주기도(36)

조회 수 2162 추천 수 0 2010.08.25 17:38:06

 

-사죄기도(3)-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했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니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기브앤드테이크’ 방식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면 주기도가 우리를 용서해달라고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다는 단서를 단 이유는 무엇이오? 그 대답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소. 하나는 이 단서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라는 사태 안으로 빠져드는 것이오. 용서의 현실로 말이오. 용서하고 용서받는 현실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는 거요. 사죄 기도는 생명의 중심과 연관된 경건한 행위요. 여기서 조심해야 할 사실은 사죄 기도를 감정의 카타르시스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오.

     오늘 교회 현장에서는 이런 감정적인 접근이 많은 것 같소. 눈물이 너무 흔하오. 툭 하면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신앙을 겨우 유지하고 있소. 소위 부흥회라는 집회에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오. 온갖 종류의 죄 목록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통곡도 마다하지 않소.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소. 한숨처럼 ‘주여!’를 반복하기도 하오. 몇 년 전에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동영상으로 시청한 적이 있소. 그는 툭 하면 설교 중간에, 또는 설교 끝에 눈물을 보였소. 10분 가까이 대성통곡하는 일도 있었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눈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할 거요. 그의 개인적인 영성을 젬 삼자인 내가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그리고 왜 그런지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동의할 수는 없소. 목사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소. 그렇게 울음을 주체할 수 없다면 골방으로 들어가는 게 맞소.

     그런 감정의 방식으로라도 뜨거운 신앙을 경험한다면 그것도 좋은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긴 하오. 요즘 신앙인들은 너무 감정이 메마른 게 문제 아니냐 하고 말이오. 오해는 마시오. 감정과 눈물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오.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이성과 합리성으로만 규정하려는 것도 아니오. 하나님 경험은 이런 언어, 이성, 논리를 뛰어넘는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오. 그렇지만 이런 언어 너머의 경험(불립문자)과 감정 주관성은 구분되어야 하오. 이단 사이비에 가까울수록 감정적인 요소가 강하오. 감정은 모든 비합리와 비상식의 문제점들을 단숨에 폐기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대는 소위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탕자가 아버지 앞에 나오면서 울었다고 생각하시오? 본문의 보도만 보면 그런 장면이 없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들의 자격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오. 내가 보기에 탕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할 때 울지 않았을 거요. 대신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울었을 가능성은 높소. 자기의 죄를 인정할 때는 최대한 맨 정신으로 하는 게 좋소.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확신이 가고 그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당연히 눈물이 날 거요.

     복음서에는 탕자의 비유와는 성격이 다른 이야기도 있소.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중에 그 동네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한 여자가 나타났소.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소. 그러자 예수님은 큰 빚을 진 사람과 적은 빚을 진 사람이 동시에 탕감을 받았을 때 큰 빚을 진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이 있다고 하셨소.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이야기는 이 여자의 눈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는 것이오. 자기 업적이 많은 사람은 결국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오.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고, 동시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소? 오스카 쿨만에 따르면, 우리는 용서를 구함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역장(力場, Kraftfeld)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멋진 표현이오. 우리는 주기도에서 사죄를 기도하오. 그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역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오. 예수님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셨소.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건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오. 현실의 삶에서는 이게 간단한 건 아니지만 그쪽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2010년 8월25일, 수, 소나기)


profile

[레벨:23]모래알

2010.08.25 23:45:29

정 목사님!

역장(力場, Kraftfeld)이라는 단어에 대해 좀 더 설명 해 주세요.

내용은 이해하겠는데 목사님께서 멋있는 표현이라 하신 그 단어는 영 생소합니다. 

profile

[레벨:28]정성훈

2010.08.26 06:41:05

전기에는 전기장 , 자기에는 자기장 , 하나님에게는 역장(力場)

 

즉,  하나님의 능력, 힘이 미치는 장(場)??..

 

요즘 제가 전기자격증 공부 하느라 이런게 생각이 나네요.. 생뚱맞죠!.

profile

[레벨:41]새하늘

2010.08.26 12:59:37

전기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시네요.

세상을 물질적 에네지계를 전자적으로 구분됩니다.

전계로 일반적인 해석으로 다시 이것을 세분하여 깊이 들어 간것이 자계이겠지요.

전기자격증 공부를 하신다고 하시니, 꼭 자격증 취득하세요.

자격증 취득하시면 자격증 취득기도 올려 주시고요,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133 ‘마루 밑 아리에티’ [3] 2010-09-21 2806
2132 돈 안 드는 삶! [3] 2010-09-20 2762
2131 주일을 기다리며 2010-09-18 2630
2130 <길은 광야의 것이다> 2010-09-17 2635
2129 죽는 순간 [3] 2010-09-16 3116
2128 천안함, 어찌할 것인가? 2010-09-15 2588
2127 삶은 공평하다 [2] 2010-09-14 3081
2126 신이 된 심리학 [6] [1] 2010-09-13 5330
2125 삶은 숨이다 [4] 2010-09-11 2851
2124 나는 걷는다 [2] 2010-09-10 2983
2123 스티븐 호킹의 신 표상 [1] 2010-09-09 3264
2122 삶은 간다 [3] 2010-09-08 2876
2121 삶에 밀착하기 [1] 2010-09-07 2138
2120 삶의 알맹이와 껍질 [5] 2010-09-06 2575
2119 경쟁에서 벗어나기 [2] 2010-09-04 2773
2118 나무 잎사귀 닦아주기 [3] 2010-09-03 4097
2117 남미-북중 2010-09-02 2127
2116 주기도(43) 2010-09-01 3011
2115 주기도(42) 2010-08-31 2682
2114 주기도(41) [1] 2010-08-30 324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