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37)

조회 수 2024 추천 수 2 2010.08.26 23:47:26

 

-시험(1)-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에 든다는 게 무슨 뜻이오? 악의 유혹에 빠진다는 말이 아니겠소. 우선 시험에 들게 하는, 또는 유혹하는 자가 누군지 생각해보시오. 성서에는 이런 유혹에 대한 일화가 많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요. 마귀가 나타나서 세 가지 시험을 하셨소. 돌로 떡을 만들라. 하나님의 아들라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주리라. 각각의 시험이 특색이 있소. 특히 세 번째 것을 보시오. 부귀와 영화는 결국 마귀의 선물이라는 뜻이 아니겠소?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하지 않겠소. 지금은 시험의 주체가 누군지를 말하고 있는 중이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소. 잘 생각해보시오. 마귀는 누구요, 무엇이오? 마귀가 주체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다는 말이오? 마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소.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4:1) 성령에게 이끌렸다고 하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시험한 주체가 성령이라는 말도 되는 거요. 시험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대목이 바로 이것이오. 시험은 사람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마귀의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건은 없다면 점에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도 아니오.

     욥의 시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소. 욥의 삶을 파괴한 이는 사탄이요. 그런데 사탄의 독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행위요. 만약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사탄도 욥을 시험할 수 없었소. 욥의 불행이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말이 가능한 거요? 이건 가능하지 않소. 이런 설명이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소.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이 없다고 하니 말이오. 이 문제를 확연하게 이해하려면 세월이 더 필요하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밖에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모순을 다 해결할 수 없는 거요. 다시 정리하겠소. 성서기자들은 두 가지 사태에서 고민한 거요. 인간에게 임하는 모든 불행과 시험은 사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하나이고,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다른 하나요.

     그대는 조금 더 솔직하게 질문해도 좋소. 실제로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했는지가 궁금하지 않소? 이 문제는 뒤에 나오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와 연결되오. 악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오. 마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사물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오. 그것을 마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생각하면 잘못이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사물과 비슷한 존재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과 같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성서의 진술을 깊이 생각해보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음성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오. 하나님의 언어는 무엇이오?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거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사실적인 게 아니라 시적인 의미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나타나서 실제로 예수님이 당시에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오. 예수님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험을 당하신 거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인간을 모든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고 예수님 자신이 생각했을 수 있소.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기억한 뒤로 그는 그 시험을 극복한 거요. 굳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초능력을 시험할 필요가 없었던 거요.

     앞에서 성서의 언어들은 시적인 의미라고 말했소. 성서를 읽으려면 이런 점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오. 오해는 마시오. 성서가 단순한 종교 문학이라는 말이 아니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오. 그대가 이 대목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오. 하나님의 말씀은, 또는 하나님의 계시는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냐, 문학적으로 임한다고 하니, 약간 이상하다고 말이오. 여기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차이를 길게 말하지 않겠소.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하겠소. 하나님을 너무 초자연적인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오. 이 세상의 자연적인 모든 것도 하나님의 행위요. 초자연적인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연적인 인식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뿐이오. 이런 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일들이오. 시에도 사실은 초자연적인 내용이 많소. “나는 시를 쓴 적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는 구절을 보시오. 이게 말이 되오? 시가 왔다는 말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읽는 사람은 시를 모르는 사람이오.

     문학적인 상상력을 배운다는 차원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받은 유혹이 무엇인지를 그린 소설을 소개하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예수의 최후의 유혹>이 그것이오. 그 소설에서 예수는 십자가 처형 순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 백마를 타고 가서 마리아 자매들과 결혼하오. 아이를 낳고 평범한 목수로 살아가오. 어느 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의 집에 들어와 멱살잡이를 벌이오. 예수를 넘어뜨리고 머리를 발로 밟으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도망친 탓에 자신들이 세상에 나가서 실패했다고 항의하오. 예수는 혼미해지는 의식 가운데 자신은 십자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고 외치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십자가 위였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적 상상력에 따르면 예수가 받은 마지막 유혹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소.(2010년 8월26일, 목, 햇빛 쨍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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