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7일 예루살렘 성전에서(6)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1:17)
예수님은 예레미야 7:1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레미야는 삶이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을 책망했습니다. 거짓말,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 바알 분향을 일삼으면서 성전에 들어와서 구원을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증한 일이었습니다.(렘 7:10)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전통적인 제사행위를 열심히 실행했습니다. 다른 시절 못지않게, 아니 더 성대하게 종교행사에 열성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위선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본인들이 그걸 결코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정성마저 느껴졌을 테지요. 그러나 그것은 위선적 진정성에 불과했습니다.
성전을 실제로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는지 아닌지를 분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모든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누구의 눈에나 들어올 수 있다면 오히려 문제 해결은 간단하겠지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에 많은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학자들이 면죄부와 교황 무오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듯이 말입니다.
오늘 한국의 개신교회는 교회당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에게는 이게 잘 보이지 않을 겁니다. 강도의 소굴에도 나름의 진정성이 있으니까요. 그들에게도 의리가 있으니까요. 거기서 밥을 하는 사람이나 청소를 하는 사람은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도의 소굴은 여전히 강도의 소굴이지 성전이 될 수는 없겠지요. 이런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예레미야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앙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다른 말로 종교적 위선입니다.
뒤척이다가 일어나 다비아에 들어왔습니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 종교적 위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한다고 경책합니다.
유다의 백성과 종교지도자들은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사다가
전통적 제사를 성전에 드렸습니다.(렘6:20)
하나님은 이것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행위가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강도들이 하는 짓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청소하고 밥하고 기도해도
그곳이 도적의 굴혈이라면 성전을 더럽힌 자와 그것을
모르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공생인 것 같기도하고
구분하여 바라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같은 배는 같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삶의 불일치와 종교적위선이란 말씀이 새벽에 다시 다가와
몇자 적었습니다.
언제나 삶의 실재에서 우리 모두 일치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
자문해봅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부터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참신앙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희망를 가지렵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신앙과 삶의 불일치라는 말씀은
'생명지향적인 삶' 하고는 전혀 상관없어 보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푹 빠져 사는 삶이겠지요.
그리고 우린 또 나르시시즘의 유혹에 얼마나 잘 넘어 가는지요.
이 종교적 위선의 늪에서 속히 벗어 나고 싶은 마음이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더 절실해 집니다.
주님, 우리의 위선을 용서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