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14일 짧은 어록(3): 용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11:25)
용서에 관한 위 구절은 기도에 관한 일련의 가르침인 마 6:5-15절의 마지막 대목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가는 긍정문으로, 마태는 부정문으로 진술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용서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요소입니다. 중요하다는 것은 그것만이 손상된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며, 어렵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용서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지금 저는 형식적으로 실행되는 용서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만 용서한다고 하지 실제로 용서하는 일은 못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자식이 잘못을 빌면 용서하겠지요. 나에게 사기를 친 친구나 나를 모욕한 친구가 용서를 빌면 용서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용서를 빌지 않을 때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실제로 마음에서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마음에 상처가 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문제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닐는지요. 그래서 복음서 기자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하나님에게서 용서받는 길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사람만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친구, 가족, 친지, 교우의 잘못을 용서하기 힘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자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바로 그 길입니다.
여주인공 신애가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을 용서한다면서 면회를 가지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자신을 다 용서했다는 말을 듣고 뒤집어 지고요.
우리의 위선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려 낼수 있을까 싶습니다.
정말 우리는 용서 못할 사람, 사랑 못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신애를 보면서 깊숙이 숨겨진 '우리의 자랑, 의'를 보게 됩니다.
언제쯤 이 위선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