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16일 권위에 대한 논쟁(2)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11:28)
산헤드린을 분점하고 있는 세 정파의 대표자들인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건네는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런 일’이라는 것은 좁게는 성전청결이고, 넓게는 공생애에서 행한 모든 일을 가리키겠지요. 이런 질문으로만 본다면 그들도 예수님의 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권위를, 즉 자격을 문제 삼는 겁니다. 당신은 대제사장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고, 장로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치료하고 성전의 매매 행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권위의 원천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정규 랍비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걸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결국 신성모독 죄의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이미 이런 질문에서 예고된 셈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권위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종교의 본질로 본다면 죽어야 할 사람도 살려야 하는 건데 이건 거꾸로 살리는 일에 매진했던 분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와 연관됩니다. 권위는 종종 폭력을 행사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권위를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으로서의 권위, 의사로서의 권위, 지휘자로서의 권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권위주의이겠지요. 권위는 내적으로 주어지는 힘이지만, 권위주의는 외적으로 만들어가는 힘입니다. 권위는 자발적인 힘이지만 권위주의는 억압적인 힘입니다. 권위가 없는 사람은 결국 권위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것들로 교회나 사회에서 다툼이 많이 나는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권위로 아랫사람을 통제하려는 사람
권위를 무시하고 소위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하는사람
불화가 걷일날 없겠죠
저는 권위라는 단어를 다른 뜻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실천에 사용해 보았드니
재미나는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권위란 권면과 위로하는것
이렇게 바꾸어 사용해 보니
세상이 평화스럽게 되었습니다
사원들과 어려울때 권면과 위로를 드렸드니
세상에 이런 위대한 사원이 내게 있다는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나 또한 저들의 권면과 위로를 기꺼이 받아 드릴것을 다짐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못된 권위보다
권면과 위로의 사람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맞춤법이 안맞을 때가 많은데 이해 바랍니다)
팀원들을 일방적으로 몰아 세우고, 업무량을 대폭 늘이면서 이것이 원칙이라고 팀원들을 강요 했습니다.
그들과 업무협조를 하는 입장으로서 한 마디를 했습니다.
"스스로 원칙을 내세우지 말아요, 그런식으로 원칙을 내세운 것은 결국 스스로의 방어하기 위한 방법 뿐이 안됩니다.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때 이루어지는 것이고,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규정들을 내세워 사람을 몰아 세우는 것은
자기만의 착각에 빠져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뿐이 안되요"라고.
오늘 Q.T 와는 별개의 뜻으로 쓰인 권위이지만, 스스로의 채워진 힘으로 남을 강요하는 힘이 아닌 모두가 인정할 수있는 힘이 권위라는 것에 생각의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