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23일 포도원 농부 비유(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12:2)
어제 저는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이 오늘의 다국적 기업가와 비슷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오해가 있을지 몰라 우선 보충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요즘의 다국적 기업가라고 한다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기 때문에 본문의 포도원 주인도 그런 이미지로 보는 건 잘못입니다. 비유는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소작) 농부들의 잘못이 핵심입니다.
이 비유가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픽션인지에 대해서 신학적 논란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를 단정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열려있는 게 아닐는지요. 당시에 부재지주들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소작농들에게 농사일을 맡기고 일정한 비율로 소출을 얻어갔습니다. 소작농들로서는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심해지면 혁명 같은 걸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일에 국가가 끼어들어서 해결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이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 건지 픽션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고 한 그 복음의 중심이 중요하겠지요.
이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배척했습니다.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런 것은 비단 이 비유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예언서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더 심하게 사랑을 배척한다는 게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상숭배로 점철되었습니다. 아마 사람은 사랑으로 변화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겠지요.
하나님도 잘 아시고 계셨겠지요~, 그래도 사랑하셨구요.
하나님은 왜 세상을 사랑하실까요? 무엇을 바라고 계실까요?
변화와 댓가에 촛점이 맞추어진 우리의 눈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