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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9년 1월12일 믿음과 구원(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
저는 앞에서 바디매오 이야기 묵상을 주로 바디매오의 실존적 입장을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핵심적으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보기를 원하나이다.”였습니다. 이 주제는 어쩌면 본문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건지 모릅니다. 나름으로 신앙적인 깊이를 담아낼 수는 있지만 성서기자가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디매오의 실존적 상황을 아무리 많이 다루었다 하더라도 그가 주인공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중심입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어 한 그 중심이 바로 위 구절입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어떤 가시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눈에 손을 댄다거나 침을 바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여기서 바디매오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만약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했다면 마가복음 기자가 그걸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장애가 치료될 거라는 확신이었을까요? 이에 관한 대답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구요.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구절이 믿음에 대한 강조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것 봐라. 바디매오가 믿음으로 장애를 고치지 않았느냐 하고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더 나아가서 믿음 만능론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긍정의 힘>이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는 믿음 만능론은 현실과도 충돌하며, 성서의 중심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
저는 앞에서 바디매오 이야기 묵상을 주로 바디매오의 실존적 입장을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핵심적으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보기를 원하나이다.”였습니다. 이 주제는 어쩌면 본문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건지 모릅니다. 나름으로 신앙적인 깊이를 담아낼 수는 있지만 성서기자가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디매오의 실존적 상황을 아무리 많이 다루었다 하더라도 그가 주인공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중심입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어 한 그 중심이 바로 위 구절입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어떤 가시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눈에 손을 댄다거나 침을 바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여기서 바디매오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만약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했다면 마가복음 기자가 그걸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장애가 치료될 거라는 확신이었을까요? 이에 관한 대답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구요.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구절이 믿음에 대한 강조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것 봐라. 바디매오가 믿음으로 장애를 고치지 않았느냐 하고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더 나아가서 믿음 만능론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긍정의 힘>이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는 믿음 만능론은 현실과도 충돌하며, 성서의 중심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그냥
간절함이 아닐까요
정말 심령이 가난한자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가장 간절한 것 단 한가지만을 바라죠.
예수님은 바디매오 안의 간절한 요구를 알고 계시니
그 간절함(네 믿음)에 대한 답(너를 구했다)을 주신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