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2일 무능력한 제자들

조회 수 3109 추천 수 12 2008.07.21 22:59:03
2008년 7월22일 무능력한 제자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8)

사도행전이 전하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못지않은 능력의 소유자들처럼 보입니다. 병자들은 지나가는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몸에 닿게 하려고 애를 쓸 정도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서도 초능력이 발현되곤 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제자들은 무능력한 사람들도 묘사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잘 헤아리지도 못하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힐 때도 많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으며,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과 복음서가 전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게 필요했습니다. 어떤 모습이 실제의 모습에 가까울까요? 그걸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서기자들은 자기의 집필 목적에 따라서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그렇게 편집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들러리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구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초라한 모습이 노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등장을 부각시킵니다.  
제 생각에 오늘의 교회에서도 역시 제자들은 무기력한 게 좋다고 봅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의 제자니까요. 예배는 당연히 그렇고, 그 이외의 모든 교회의 행태도 역시 사람을 축소시키고 주님의 영만을 클로즈업 시키는 방향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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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7.22 09:08:29

목사님,골치가 또 아파 오네요..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들러리 역할에 머물렀다는 표현,
복음서는 제자들의 무능력함으로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등장을 부각시켰다는 표현,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게 필요했다는 표현,>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사도행전에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가장 중심의 하나라고 할수 있는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된것 아닌가요?
이로써 제자들은 권능을 받고 행하게 된것 아닌가요?


너무 예수님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완전 맹물로 취급해 버리시네요..
2000년 기독교, 제자들이 받은 권능과,그들이 준 교훈,가르침, 순교의 댓가가 없었다면
오늘날 예수가 전하라는 이 복음이 온전히 존재케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목사님의 오늘 해석은 도저히 납득이 잘 가질 않습니다.
아 이거 점점 골치가 아파지지는것 같습니다...

[레벨:0]데오그라시아

2008.07.22 10:44:41

마가가 자신의 공동체에서 제자들의 무능력을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생명체험과 그리스도의 생명에 일치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것이 아닐까요?

오늘날에도 교회와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무능력하게 비치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자신과 세상에 집착하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며 진정으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는데..정목사님의 설교와 묵상속에 늘 새빛을 얻으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레벨:4]알고파

2008.07.22 17:46:49

저별과 달님의 순수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신학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보수적인 식학을 하는 신약학자들도
이런 식으로 제자들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복음사가들에게 이런 식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알고 동의하는 내용들이 왜 평신도에게는 전달이 안 될까요?
우리의 믿음에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아서 일까요?
우리에게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니까요.
안셀무스가 그랬나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해 자체가 필요 없는 아니지요.
참고로 저는 의사(가정의학과)입니다.
콜레스테롤을 먹는 것이 콜레스테롤 수치와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대부분의 영양학자는 알고 다수의 의사는 알지만 환자 대부분은 잘 모릅니다.
잘못된 노력이나 치료를 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지요.
신학도 마찬가지 인걸로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알고 동의하는 내용이 평신도에게도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콜레스테롤을 먹어도 콜레스테롤이 많이는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일반 환자에게 잘 알려져야 하듯이 말입니다.
참고로 콜레스테롤은 식사 보다는 유전적인 경향이 더 중요합니다.
식사에서는 콜레스테롤 그 자체 보다는
포화지방산(삼겹살 같은)이나 트랜스지방(도너츠)이 더 연관이 많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참.. 저두 교회에서 병원으로 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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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7.22 19:27:21

알고파님, 어떠한 보수 신학자가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게 필요해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이런식으로 기록 되었다고 하였는지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확연히 다른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목사님!목사님의의 말씀대로 사도행전에는 그게 필요해서 사도들의 능력과,이적과,치유의 기적들이
기록 되었다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럼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가요?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니 답변 좀 부탁 드립니다..

[레벨:7]시드니

2008.07.22 20:01:24

복음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대함)
제자로서의 모습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지도 않고(누가 크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심은 있으되, 그것을 지킬 능력은 없고(베드로의 부인),
병고치거나 귀신 쫓는 능력도 신통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신앙에 대해서 얘기할 때, 답답한 벽에 부딪치는 기분이 들 때에
위의 사실을 상기하고는 합니다.
예수님도 못하신 일을 내가 할려고 하는구나, 하고 실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신 다음에는
제자들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봅니다.

이것을 복음(십자가)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성령님의 알게하심으로
성경에 쓰여져 있는대로 믿는 것은 순진하고, 문자적인 믿음인가요?

저도 근본주의, 문자주의의 신앙이었다가, 정목사님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문자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신앙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부활사건과 십자가, 또 그것으로 인한
제자들의 변화에대한 믿음도, 다시 새각해야하는 건가요?

저도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어느 글의 저자라도, 자기의 글의 전체 목적을 위해서, 어느 부분은 강조하고,
어느 부분은 약하게 표현함으로서, 강약의 대비에 의해서 주인공이나, 메인 주제가
부각되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변화는, 그것이 바로 저의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기에, 그것을 가장 중요한 정황적인 증거로 보기에,
그것이 전적으로 글쓰기 기법이라고 한다면, 너무 허무합니다.

인문학적인 분석이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야 하는건지, 솔직이 혼란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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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7.22 23:32:19

위의 대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한꺼번에 묶어서 두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몇몇 분들의 궁금증이 사도행전의 사도들, 그들의 변화, 그들의 경험에 있군요.
이런 문제는 지금 이렇게 짧은 글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어쩌면 이미 앞에서 다룬 이야기일 수도 있구요.
신학적인 시각이 열리지 않으면 이런 답답증은 반복될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탁월한 헌신과 능력 등등은
객관적 역사는 아니랍니다.
그들이 예수 부활 현현에 대한 분명한 경험이 있었다는 건 분명한데요,
그것도 그렇게 하루 이틀에 확 완성된 경험이 아니에요.
이런 문제를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서 길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우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아마 다비아에도 이에 관해 여러분 다루었을 텐데,
검색창을 통해서 찾아보세요.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과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의 바울이
크게 다른 이유도 바로 사도행전이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걸 간접 증명합니다.
사도행전이 순전히 픽션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것은 더 어떤 본질적인 하나님의 행위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거지요.
그게 뭘까요?
몇몇 분들이 반복해서 힘들어 하는 이유는
성서를 자꾸만 뉴스 보도처럼 읽으려고 한다는 것이에요.
시드니 님도 혼란스럽다구요.
삶의 허무를 넘어서야만 삶이 눈에 들어오듯이
실증적인 세계관을 넘어서야 신앙적 세계관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오늘은 이만,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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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7.23 01:13:59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사건과 초대교회 제자들의 생활상 ,바울의회심, 전도여행
이런 사건들을, 특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역사적으로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이 흐지부지 되고 마는데요..
오순절 성령강림이 간단하게 넘어갈 사건이 아닌것 같습니다.
이 사건으로 제자들과 현재의 우리들에게 까지 신앙이,또한 기독교가
존재하게 되었고 또한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중요한 지상사역의 절정이요,
새 언약과,새 시대가 도래하는것 아닌가요?
성령강림이 주님의 구원사역과,기독교의 맥을 이루는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제가 진지하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질문 드렸는데
목사님, 많이 허무하게 넘어 가시네요..

[레벨:4]알고파

2008.07.23 01:21:20

1. IVP 성경배경 주석(크레이그 키너, p154)

마가복음에서 이와 관련된 주제는 제자들의 실패이다.
고대 저자들은 주연을 돋보이기 위해 조연들의 섬세한 감정은
종종 가볍게 다루어 버리곤 했다...이하 생략

2. 신약의 윤리적 비전(리처드 헤이스, p133)

그러나 동시에 마가가 그리는 예수님의 권능행사와 평행을 이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묘사이다....중략.....
왜 제자들은 이처럼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일까?......중략...
제자들의 실패 속에서 대리적인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결국 용서를
받고 더 신실하게 살라는 권면을 받는다..

3. 새로운 신약성서개론(대한기독교서회, p158)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중략...
그러므로 제자들에 관한 마가의 네러티브는 반복하여 실망스러운 것이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종종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입장에 서있다... 이하 생략..

4. 마태마가누가의 예수이야기(김광수,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p100-101)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제자들은 예수가 그들을 택한 목적과 멀어진다...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베드로의 고백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마가는 예수와 일반 신자들 사이에 있는 모든 권위의 인물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예수의 가족들, 제자들, 메시야 예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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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7.23 02:17:20

알고파님 댓글 감사한데요..
제가 질문한 논지와는 핀트가 비켜나간 내용 같군요..
예를 들어 크레이거 키너의
"고대 저자들은 주연을 돋보이기 위해 조연들의 섬세한 감정은
종종 가볍게 다루어 버리곤 했다" 는 말은

정 목사님이 말씀하고 제가 질문한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게 필요해서
취사선택해서 편집 했다는 사실과는 다른 논지의 주석 내용이네요"

전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전에는 정 목사님 말씀대로 무능력했다는
말에는 동의 하는데요 성령강림 사건후는 무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알고파님이 얘기하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알고 동의하는 내용들은 정 목사님이 이 글에서 거론하고
제가 알고파 님에게 위에서 질문한 내용과는 다른 부분인것 같습니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알고파님이 처음 댓글에서 주장한 부분을을 제가 정확하게
이해 못한것 같구요..
알고파 님도 위에서 제가 무얼 질문 했는지 정확하게 방향을 못 잡으신것 같습니다

[레벨:4]알고파

2008.07.23 08:14:50

저별과 달님..
저는 마가복음에 대한 부분만 찾아보았는데요.
사도행전 것도 찾아다 드려야 할까요?
사도행전에 대한 주석이나 개론적인 가르침의 글을 한 번 찾아 보십시요..
성경의 원 text가 물론 중요하지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기 슆습니다.

[레벨:7]시드니

2008.07.23 09:45:45

<실증적인 세계관을 넘어서야 신앙적 세계관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정목사님에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좀 더 공부해 볼랍니다.

주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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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7.23 22:39:39

알고파 님은 평신도 신학자시군요.
신학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지요.
철학교수만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살아는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듯이
평신도들도 분명히 신학적 사유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합니다.
알고파 님이 그 길을 잘 가고 있는 것 같군요.

시드니 님도 그 길로 들어가려고 마음을 여신 것 같구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무언지....

저별 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한 가지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오순절 성령사건을 말하려면,
우선 성령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답니다.
성령이 생명의 영이라는 건 아시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도 알지요?
어떻게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능력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 가능할까요?
이런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게 바로 성령론이랍니다.
그런 바탕이 없이 무조건 오순절 사건을 사실이다, 아니다 하고 주장하면
건전한 대화가 불가능하답니다.
일단 (성)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왜 고대인들은 바람과 영을 동일한 언어인 '루아흐'라고 발음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세요.
저별 님이 신학적 영성으로 들어가려면
가능한 대로 앞서 배운 기독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일단 잊어야만 할 것 같군요.
그러나 염려 마세요.
우리가 기독교 진리의 실체를 정확하게 몰라도
구원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구원은 오직 은총일 뿐이지요.

모두 좋은 밤,
좋은 휴가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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