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목
구원 지향적 삶
지난 설교 제목은 ‘심판과 구원’이었다. 이에 해당되는 핵심 구절은 요 3:17절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심판과 구원을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대하게 할 염려가 있다. 어떤 이는 심판받고 어떤 이는 구원받는다고 말이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것도 아니다. 이런 표현이 애매하게 들리겠지만, 궁극적인 것은 애매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그 누구도 심판과 구원을 결정할 수 없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교회 밖의 구원을 완전히 부정하면 기독교 신앙은 자체 모순에 빠진다. 예수의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조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책임은 결국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예수를 통한 구원이 기독교인들에게만 한정된다고 주장하면 그리스도론의 우주적 깊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저 구절을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경험했다. 예수를 통해서 전체 삶을 구원 지향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말이다. 예수를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상이 구원으로 경험된다는 뜻이다. 두 발로 서서 중심을 잡고 걷는 것도 구원이고,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도 구원이고, 노동도 구원이다. 사랑도 구원이지만, 거꾸로 실연도 구원이다. 건강도 구원이지만 병도 구원이다. 극단적으로는 시한부 삶도 구원이다. 인생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시한부 아닌가. 문제는 예수와의 일치가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