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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존재하는 자’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꾼다는 말은 자칫 공허한 말로 들릴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적으로 바뀐다는 말 자체를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 생활에서도 이런 경향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의 신앙 패러다임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낀다. 한국교회에 성서문자주의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젊은 시절에 읽은 몇 권의 책에서 나는 사유가 혁명적으로 바뀐다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소로우의 『월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싯다르타』 등등이다. 밤 새워서 읽은 책 목록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 뒤로 영향을 받은 여러 책들이 있지만 위에 거론한 책들은 나의 세계관을 바뀌게 했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질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각권에 대한 것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다른 이들도 다 아는 이야기다. 이런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세계가 전혀 다르게 경험되었다는 사실만 말하면 된다. 동굴 안에서만 살던 사람이 동굴 밖을 경험하는 거와 같다.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경험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하다. 그중에 모세의 하나님 경험이 압권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발견했다는 말은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에게만 의존하게 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 경험은 사람들이 만든 모든 체제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의 복음도 역시 이런 해방이다. 오늘날 전업 목사로 사는 우리는 해방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100편째 글이라서 누구보다도 먼저 댓글을 이렇게 후다닥! ㅎㅎ
아주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