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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7월14일 부활이 뭐꼬? [2]

  • 2008-07-13
  • 조회 수 1756

2008년 7월14일 부활이 뭐꼬?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 9:10)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비밀로 부치라는 9절 말씀에 이어서 마가복음 기자는 10절에서 제자들이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했다고 보도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세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다니, 그것이 실제로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7월13일 제자들이 본 것 [4]

  • 2008-07-13
  • 조회 수 1744

2008년 7월13일 제자들이 본 것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마가복음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예수의 옷에 광채가 났고, 모세와 엘리아가 등장했으며, 구름 속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일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어떤 현상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

7월12일 죽음 너머의 생명 [2]

  • 2008-07-11
  • 조회 수 1824

2008년 7월12일 죽음 너머의 생명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에서 부활신앙이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런 주장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음 너머의 생명을 말한다는 것은 생명을 통전(integrity)적으...

7월11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2]

  • 2008-07-10
  • 조회 수 1994

2008년 7월11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사도신경의 한 대목도 위의 구절과 일치됩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초기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이 한 구절에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과 삶의 대비입니다. 죽은 자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의 대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무슨 경험을 했기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

7월10일 예수 사건의 유일회성 [8]

  • 2008-07-09
  • 조회 수 2439

2008년 7월10일 예수 사건의 유일회성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라는 건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왜 기독교만의 배타적 사건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반국가사범에 대한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예수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부활 전승도 기독교에게만 있는 건 아닙니...

7월9일 침묵 명령 [3]

  • 2008-07-08
  • 조회 수 1936

2008년 7월9일 침묵 명령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직접 서술한 다음에 이제 9-13절에서 그것과 모순되는 고난의 그리스도 상을 제시합니다. 그 고난의 문제는 14-29절에서 고난 받는 간질병 아이와 예수의 치유 능력이 보도되면서 더 확장됩니다. 고난의 그리스도와 그것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를 기본 축으로 전개되는 마가의 신학에서 볼 때 이런 진행은 자연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으...

7월8일 오직 예수 [1]

  • 2008-07-07
  • 조회 수 1775

2008년 7월8일 오직 예수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막 9:8) 변형 사건의 장면이 또 바뀌는군요. 마치 애니메이션의 몇 장면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옷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리고 곧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다음에는 구름이 그들을 휩싸면서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모든 변화가 멈추었습니다. 광채도, 엘리야와 모세도, 구름도, 소리도 사라졌습니다. 제자들 앞에는 오직 예...

7월7일 그의 말을 들으라! [4]

  • 2008-07-06
  • 조회 수 1746

2008년 7월7일 그의 말을 들으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어제 묵상의 끝 부분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 운운했는데, 오늘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 즉 창조 행위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이 창조 행위는 해와 달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것이듯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비와 빛을 내려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 ...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5]

  • 2008-07-05
  • 조회 수 2225

2008년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구름 속에서 나온 소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였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소리현상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내용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앞에서 몇 번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구름 속의 소리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탈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되면 신앙이...

7월5일 구름 속의 소리 [1]

  • 2008-07-04
  • 조회 수 1666

2008년 7월5일 구름 속의 소리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초막 셋을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변형 전승에서 예수님의 침묵은 시종일관이었군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았겠지요. 어쨌든지 제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제 상황이 조금 바뀝니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

7월4일 제자들의 두려움 [5]

  • 2008-07-03
  • 조회 수 1851

2008년 7월4일 고난에 대한 두려움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막 9:6) 초막 세 채를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한 마가복음 기자의 평가는 차갑습니다. “그들이 몹시 무서워” 했다고 하는데,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변형과 구약인물의 출현을 두려워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신학의 방향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즉 그들이 천상의 세계에 초막을 짓고 머무르려 한 것은 곧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고난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말입니다. 마가...

7월3일 초막 셋 [5]

  • 2008-07-02
  • 조회 수 3838

2008년 7월3일 초막 셋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천상의 세계를 경험한 베드로는 그곳에 세 채의 초막을 짓겠다고 제언합니다. 그 세 채는 물론 예수님, 엘리야, 모세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발상이 조금 유치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긴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푸른 나무 가지로 만든 초막에서 지내야 했으며(느헤미야 8:14,15),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 분위...

7월2일 “여기” [2]

  • 2008-07-01
  • 조회 수 1910

2008년 7월2일 “여기”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오늘 본문에도 베드로의 성격이 여지없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기가 좋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세 채의 초막집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천상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메커니즘이 허물어집...

7월1일 엘리야와 모세 [3]

  • 2008-06-30
  • 조회 수 3207

2008년 7월1일 엘리야와 모세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막 9:3) 예수님의 변형 순간에 함께 했다는 엘리야와 모세는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모두 산에서 하나님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의 승천 기사는 아주 분명하게(왕하 2:11) 기록되었지만, 모세의 승천은 유대교 이외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

6월30일 광채 [4]

  • 2008-06-29
  • 조회 수 2052

2008년 6월30일 광채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 9:3)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변형을 광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광채는 신적인 영광에 대한 문학적 서술입니다. 출애굽기 34:29의 보도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와 대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보려고 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가 예수님이 묻...

6월29일 변화산에 올라 [2]

  • 2008-06-28
  • 조회 수 1888

2008년 6월29일 변화산에 올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막 9:2) 마가복음 기자는 앞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언급한 뒤에 이제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보도합니다. ‘엿새 후에’라는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엿새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사건이 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겠지요. 일단 본문을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

6월28일 ‘어록’6-7 [2]

  • 2008-06-27
  • 조회 수 1621

2008년 6월28일 ‘어록’6-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주제를 잘 정리만 하면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과 종말론적 세계 완성을 종합적으로 다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짧은 묵상의 주제로만 접근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진술이 기독론적인 ...

6월27일 ‘어록’6-6 [1]

  • 2008-06-26
  • 조회 수 1307

2008년 6월27일 ‘어록’6-6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합니다. 권능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끌어내거나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뿐이지요. 이런 권능을 우리가 무엇에 비교할 수...

6월26일 ‘어록’6-5

  • 2008-06-25
  • 조회 수 1637

2008년 6월26일 ‘어록’6-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어제 저는 주님의 재림 사건을 만화처럼 그릴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종말에 완성될 그 생명을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온다는 것만은 성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사실이며,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재림하는 때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재림의 주님이 초림의 주님...

6월25일 ‘어록’6-4

  • 2008-06-24
  • 조회 수 1327

2008년 6월25일 ‘어록’6-4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예수의 재림은 우리의 머릿속에 아주 분명한 그림으로 그려지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별로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구도를 단순화한다면, 전자는 실증적이고 후자는 관념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증과 관념은 어떤 현실(reality)에 접근하는 전혀 다른 방식이래서 그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긴장 가운데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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