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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아이혀는 하나님의 질문에서 잘못된 것을 두 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보다 높은 지식에 대한 지적 전문가들의 이론적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는 물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론, 아퀴나스의 자연 이해, 루터의 두 왕국설, 칼뱅의 이중 예정론,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판넨베르크의 이성과 계시의 관계,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와 종말 이해 등등, 여러 위대한 신학자들의 신학 이론을 파악하는 것에만 머무는 질문이 그것이다. 교회 현장과 세상을 떠나서 신학 이론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은 순전한 사변으로 떨어진다. 신학 이론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지적 호기심에 머무는 것이 문제다. 삶에서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목회의 실용적 차원에서만 질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전형적인 행태가 이것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질문에서는 사회와 역사의 차원이 철저하게 배제된다. 남북분단 문제나 노동 문제, 그리고 동성애 문제 등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윤리 문제도 개인 윤리만 다루지 사회 윤리로 나가지 못한다. 자폐적이고 퇴행적이다. 사이비 과학이자 사이비 신학이라 할 창조과학이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전체적으로 목사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다. 목사가 자기 구원에 관심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그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하는지를 봐야 하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페터 아이혀의 설명을 근거로 따라가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도 질문 나름이다. 필요한 질문이 있고 필요 없거나 잘못된 질문이 있다. 위에서는 잘못된 질문을 두 가지로 짚었는데, 다음은 바람직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