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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공생애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는 말로 시작해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막 15:34)로 끝난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갔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토로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믿음에서 불신앙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하나님 계심에서 하나님 없음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이런 마지막 고백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유대 전통에서 보나 로마 전통에서 보나 똑같이 저주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종종 경험한다. 버림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리킨다. 세상엔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당하고, 이유 없이 발생하는 재난도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유난히 높다. 그들의 자살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왜 우리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게 한다. 이런 경우를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거꾸로 세상을 대충 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도 경험하지 못한다. 믿음이 좋다는 한국교회 신자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흔히 나타난다. 그들은 늘 찬송과 기도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독차지한 듯이 살아간다. 실제로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인식이 천박해서 그런 삶의 태도를 보인다. 하나님 없음, 또는 버림받음의 실존적 깊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역시 경박한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목사들이 무신론을 무시하거나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바란다. 정당한 무신론은 기독교 신앙을 건강하게 한다. 포이에르바흐나 니체 같은 이들의 무신론이 그렇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들이다.’ 이런 표현은 역설적이다. 당시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살리는 게 아니라 위축시키는 신으로 왜곡되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반생명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자아의 투사로 나타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나타났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이 기복주의와 반공주의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신은 신이 아니니 결국 기독교가 신을 죽인 거 아닌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라는 예수의 하나님 경험이야말로 하나님 경험의 가장 원초적 차원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거와 같은 인간 실존에 대한 뼈저린 경험으로부터만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본회퍼 버전으로 말하면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어제 올리신 글 속에서 ( 하나님은 우리의 숨과 같아서 삶속에 늘 함께하신다) 라는 말씀에서 이 숨과같음이 배제된 상황을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을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것과 같다 라고 이해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