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금
영적인 금식
지난 설교에서 신앙생활을 ‘영적인 금식’이라고 말했다. 일상의 과잉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과잉은 곧 영적인 비만이다.
나는 일상을 무시하고 초월적인 하늘나라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에는 하늘나라가 비밀한 방식으로 내재하고 있으니 일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숨쉬고, 먹고, 마시는 일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건과 사건들이 일상이다. 이런 일상이 우리 삶을 구성한다.
문제는 오늘 대다수의 일상이 직간접적으로 돈 버는 것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지만 나중에는 돈이 돈을 벌도록 강요한다. ‘나는 돈을 번다. 고로 존재한다.’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킨다.’고 말한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니까 그렇게 말해도 된다. 그 말은 곧 주일에는 일상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그게 안식일의 본질이다. 모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일상으로부터의 단절이자 해방이다. 이런 일상으로부터의 단절을 통한 해방 경험이 주일만이 아니라 다른 날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일상의 과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일상의 과잉, 일상의 비만으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할까?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 자영업을 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장사에 매달려야 한다. 이웃집과 경쟁해야 하고, 온갖 종류의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정년 은퇴하여 귀촌한 사람 외에는 과도한 일상을 거부할 수가 없다.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는 각자가 그걸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데도 스스로 그 일상과잉의 삶으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가는 경우다. 내가 아는 게 목회뿐이니 그걸 예로 들면 이렇다. 목사가 공부하고 말씀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각종 이벤트를 만들고 신자들을 쫓아다는 것에 마음을 쓴다면 목회 일상의 과잉이다. 교회 성장에 목을 매는 목사는 스스로 그런 구조 속으로 머리를 박는 것이다. 일반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개는 구조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일상 비만에 떨어진다. 일상의 금식, 일상의 건강을 찾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