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0일 오병이어 (47)

조회 수 1376 추천 수 8 2007.09.09 23:31:20
2007년 9월10일  오병이어 (47)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말씀 묵상의 한계를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제의 말씀을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저는 어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일절 침묵하고 있으며, 그런 기적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여기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의 선교역사를 거론할 분들이 있겠군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그런 초자연적 사건에 개입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사도행전은 바울에 관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가 바울의 활동에 대해서 기록한 문서이며, 복음서는 각각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기록한 문서입니다. 바울에게는 그가 직접 집필한 편지가 있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런 글이 없어서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바울 상(像)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상 사이에는 적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게 신약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여기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본다면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초능력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의 서신에는 없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 그런 구절을 찾으신 분은 저에게 알려주세요.) 왜 이렇게 다를까요?
바울에 관한 사도행전의 보도는 사실을 다룬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죽은 지 최소한 한 세대 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의 히브리파 기독교가 쇠퇴하고 바울의 헬라파 기독교가 주류로 등장할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 구전과 자료를 앞에 두고 바울의 역사를 복원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에 얼마나 정확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profile

[레벨:32]자유의꿈

2007.09.10 01:04:32

사도행전에 나타난 구체적인 초자연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바울도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나 본질이 아니므로 구태여 자세히 기록할 이유는 없었을 것 같네요.

그렇지만 바울서신에서 다음과 같은 관련된 표현들을 몇구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롬 15: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고후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고전 12:9~10)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그래서 바울에 관한 사도행전의 보도가 사실을 다룬게 아니라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루어진 현상(초자연적으로 보이는)으로 수용할 수는 없을까요? 물론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나 핵심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9.10 10:03:19

자유의 꿈 님,
저보다 성경에 대해서 훨씬 많이 아시는군요.
저는 위의 꼭지글을 쓰면서 자유 님이 열거한 성구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잘 알고 있었던 성구지만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겁니다.
아무래도 제 위 꼭지글을 조금 수정해야겠군요.
바울 서신에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표현을
'많지 않다.'거나 '별로 없다.'로 해야겠군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구요,
위의 성구만으로 바울의 초자연적 능력이나 그런 현상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모든 성경 구절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 본문이 바르게 해석될 수 있어요.
크게 본다면 바울은 세 부류로부터 신학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세 부류와 싸웠습니다.
1. 율법주의자
2. 율법폐기론자(니골라당)
3. 열광주의자
가장 밑바닥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세력이 자리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거의 왕따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해서 무지하게 노력한 사람입니다.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한
"표적과 기사"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자신의 이방인 선교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된 성구들은 주로 열광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열광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위의 성구들은 기적과 표적, 초자연적 현상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위의 구절은 그것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상대성, 또는 편향성을 지적한다고 보아야겠지요.
제 설명이 조금 복잡하지요?
2천년 전 문서를 해석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답니다.
신학은 바로 그런 노력이지요.
아직도 우리는 2천년 전 그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증적으로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신학은 살아있는 거지요.
아마 종말까지 이런 과정은 계속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자유 님의 입장이나 저의 입장이 큰 틀에서는 비슷하군요.
초자연적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점에서요.
다만 초자연적 사건을 사실로 보는가 아닌가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자유 님은 사실(fact)에 방점을 찍고,
저는 사건(event)에 찍습니다.
좋은 하루!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7.09.10 15:25:43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바울 상(像)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상 사이에는 적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게 신약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제가 요즘 신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박태식(요한)신부님이 바울로 신학을 쉽게 설명한 신학서적을 읽고 있는데, 박신부님도 사도행전의 바울로보다는 바울로 서신의 바울로가 더 믿을수 있다고 하셨죠. 본인이 자신을 소개한 게 더 신빙성이 있다고요..

[레벨:5]spark

2007.09.10 23:36:27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늘 감사를 드립니다.
한 가지 우문이 있습니다. 사실과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는지 설명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9.10 23:51:40

스파크 님,
'사실'은 뉴스와 같은 사실 보도를 뜻하고,
'사건'은 사설처럼 편집자의 해석이 깃든 보도입니다.
성서의 보도는 사실도 있지만
실제로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저자의 신학적 의도가 깊숙이 개입된 것이지요.
profile

[레벨:32]자유의꿈

2007.09.11 02:46:41

제가 목사님보다 성경을 많이 안다니요? 어휴 그런 말씀 마세요~
저도 그 구절을 생각해 낸게 아니고 그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찾아본 것 뿐이랍니다^^;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표적과 기사를 언급한 것이 꼭 중요하기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겠군요.

제가 fact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구요, 다비아에서 배우면서 event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다만, event에 주안점을 두어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기에
fact 여부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좀 바빠서 댓글이 늦었네요~)

[레벨:0]도루박

2007.09.11 10:16:00

성서 속의 어떤 사실이 있었느냐하는 점은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고 관심있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실이 있고나서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데요, 최소한 인정해야 할 사실들이 어떤것인가? 성서기자가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은 우리 기독교신자들이 충분히 어떤 공감대를 가지고 받아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그 핵심되는 사실을 '해석'으로 보느냐 '사실'로 보느냐에 따라 신자냐 아니면 그저 그런 얼머스트 크리스챤이냐가 갈려진다고 봅니다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9월18일 오병이어 (55) [4]

  • 2007-09-17
  • 조회 수 1227

2007년 9월18일 오병이어 (55)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밥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면 이 밥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밥은 살아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그 밥이 우리의 생명을 영원하게 유지시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상의 혼령이 제삿밥을 먹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밥은 제한적인 생명인 셈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밥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데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9월17일 오병이어 (54)

  • 2007-09-16
  • 조회 수 1368

2007년 9월17일 오병이어 (54)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 묵상에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초기 기독교가 이해하고 믿었던 하늘에서 내려온 밥과 실제의 밥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의 밥은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만나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만나를 먹고 살다가 그들처럼 죽겠지요. 그렇다면 만나인 밥은 우리의 생명을 잠시 유지시킬 뿐입니다. 그런 밥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저는 지금 딜레마에 빠진 것 같습니다. 밥이 없으면 우...

9월16일 오병이어 (53)

  • 2007-09-15
  • 조회 수 1119

2007년 9월16일 오병이어 (53)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오병이어에 관한 해석인 요한복음 6:22-59절은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생명의 양식이라고 믿었습니다. 3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에게 오는 사람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말은 분명히 문자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고, 감기 몸살에 걸리면 괴롭습...

9월15일 오병이어 (52) [4]

  • 2007-09-14
  • 조회 수 1200

2007년 9월15일 오병이어 (52)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김지하 시인은 1984년에 이야기 모음집 <밥>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밥이라고 지칭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 내용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오병이어 사건을 일단 공관복음과 비슷한 구조로 전한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따라서 (재)해석합니다. 그 해석이 요 6:22-59절입니다. 이 본문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요한복음의 고유한 진술입니다. 이 대목에서 핵심은 35절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

9월14일 오병이어 (51) [3]

  • 2007-09-13
  • 조회 수 1434

2007년 9월14일 오병이어 (51)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오병이어로 남자만 계산해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결식아동들과 결식노인들도 상당한 숫자입니다. 북한을 비롯해서 총체적으로 가난한 나라로 눈을 돌리면 배고픈 사람들 천지입니다. 그들은 왜 배가 고플까요? 간단하게만 본다면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이겠지요. 일반적으로 가난은 본인의 책임으로 취급됩니다. 당사자의 게으름이나 무책...

9월13일 오병이어 (50) [4]

  • 2007-09-12
  • 조회 수 1673

2007년 9월13일 오병이어 (50)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기적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을 위해서 이 문제를 한 번 더 언급해야겠군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은 성서 밖의 세계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지금도 그런 소문들은 많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이런 현상들이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성모 마리아가 직접 현현했다는 이야기나 병자를 특별한 능력으로 고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신약성서에 들어오지 못한 외경이나 위경 중에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행한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9월12일 오병이어 (49) [4]

  • 2007-09-11
  • 조회 수 1411

2007년 9월12일 오병이어 (49)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당신은 오병이어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이 사건을 믿는지, 아니면 믿지 않는지 분명히 대답하라고 다그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말을 자꾸 빙빙 돌리는 걸 보니 믿지 않는 것 같다고 예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저는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전하고 있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다시 질문합니다. 그때 무슨 일...

9월11일 오병이어 (48) [11]

  • 2007-09-10
  • 조회 수 1411

2007년 9월11일 오병이어 (48)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지금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을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설명이 본문에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들이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대하든지 그것을 성서 전체와 연관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텍스트는 그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속한 마가복음 전체와 연결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복음서 및 신약성서 전체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게 아닙니다. 구약...

9월10일 오병이어 (47) [7]

  • 2007-09-09
  • 조회 수 1376

2007년 9월10일 오병이어 (47)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말씀 묵상의 한계를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제의 말씀을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저는 어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일절 침묵하고 있으며, 그런 기적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여기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의 선교역사를 거론할 분들이 있겠군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그런 초자연적 사건에 개입되었습니다...

9월9일 오병이어 (46) [1]

  • 2007-09-08
  • 조회 수 1129

2007년 9월9일 오병이어 (46)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 묵상에서 묻어두었던 두 질문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첫째,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결국 똑같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기적 행위자로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복음서의 중심은 아닙니다.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사건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단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

9월8일 오병이어 (45) [3]

  • 2007-09-07
  • 조회 수 1243

2007년 9월8일 오병이어 (45)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성서는 기본적으로 전승입니다. 신문기자가 어떤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직접 받아 쓴 게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성서는 단순보도가 아니라 해석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인 해석입니다. 셋째, 성서에 진술된 초자연적 현상은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주체가 핵심입니다. 그 주체는 물론 하나님이며, 우리의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

9월7일 오병이어 (44) [6]

  • 2007-09-06
  • 조회 수 1231

2007년 9월7일 오병이어 (44)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떡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고 합니다. 남자만 계산해도 5천명이 넘는다고 하는 그 많은 무리들이, 그래서 제자들이 이들을 먹이려면 2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말한 그 무리들이 배불리 먹었다는군요.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가 무얼 말하는지 따라잡기가 쉽지 않군요. 바로 앞 대목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끼니때가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는...

9월6일 오병이어 (43)

  • 2007-09-05
  • 조회 수 1444

2007년 9월6일 오병이어 (43)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우리가 하나님의 현실성을 경험한다는 것은 거룩한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Das Heilige>(거룩함)이라는 책에서 이런 경험을 가리켜 ‘누미노제’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느낀, 이사야가 성전에서 느낀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는 ...

9월5일 오병이어 (42)

  • 2007-09-04
  • 조회 수 1257

2007년 9월5일 오병이어 (42)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저는 어제 “하나님의 현실성”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왜 하나님의 현실성이라고 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약간의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주로 현실성(reality)이라는 단어가 거추장스럽겠지요. reality라는 영어 단어는 독일어 Wirklichkeit에 해당...

9월4일 오병이어 (41)

  • 2007-09-03
  • 조회 수 1157

2007년 9월4일 오병이어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데릴사위로 지내다가 어느 날 호렙산에서 야훼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나무가 타지 않는 이상한 현상 앞에 섰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

9월3일 오병이어 (40)

  • 2007-09-02
  • 조회 수 1384

2007년 9월3일 오병이어 (40)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야훼께서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옷자락이 성소를 덮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날개가 여섯 씩 달린 스랍들이 야훼 하나님을 모시고 훨훨 날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

9월2일 오병이어 (39)

  • 2007-09-01
  • 조회 수 1267

2007년 9월2일 오병이어 (39)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류시화 님이 번역한 바바하리 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도의 히말라야에서 태어난 저자는 일찌감치 득도의 여정에 올라 침묵과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름도, 전개되는 줄거리도 모두 잊었고, 결론 부분만 조금 남아 있습니다. 주인공이 여러 곳을 거친 ...

9월1일 오병이어 (38) [1]

  • 2007-08-31
  • 조회 수 1433

2007년 9월1일 오병이어 (38)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어제의 묵상에 저는 부끄러운 우리의 손에 거룩한 오병이어가 담겨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룩한 오병이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앞으로 당분간 ‘거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겠군요. 저는 모파상의 <비계 덩어리>라는 단편 소설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공...

8월31일 오병이어 (37) [3]

  • 2007-08-31
  • 조회 수 1148

2007년 8월31일 오병이어 (37)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지금 우리의 손에는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생명의 떡과 생선이 부끄러운 우리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이 두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오병이어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갈릴리 광야에 모였던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먹을거리이며, 또한 출애굽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 ...

8월30일 오병이어 (36) [1]

  • 2007-08-29
  • 조회 수 1317

2007년 8월30일 오병이어 (3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막 6:41) 오늘 본문의 장면을 다시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봅시다. 해가 기울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백 명씩, 오십 명씩 모여 앉아있습니다.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어디서 먹을거리를 구해 와야 할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에 제자들에게 떼어주셨습니다. ...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