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구원(29)

조회 수 1064 추천 수 0 2018.02.09 22:20:49

(29)

존재 지향적 목회의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만 들겠다. 먼저 존재 지향적 설교 행위다. 존재 지향적 설교는 설교 자체에 집중하는 설교를 가리킨다. 설교 행위 자체가 아니라 설교를 들어야 할 회중들에게 집중하는 설교가 많다.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설교의 목적이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리고 신학대학 설교학 교수들이 그렇게 가르치기도 하겠지만, 설교 행위에 대한 오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설교 행위는 말하기에 앞서 듣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선포하기에 앞서 들었다. 들은 충격이 너무 커서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모든 선지자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걸 신탁(神託) 경험이라고 한다. 오늘의 설교자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설교자를 향해서 당신은 못 들었어.’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들이 전혀 못 들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회중들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깊이에서 말씀을 들은 건 아니다. 자신의 수준에서만 들은 채, 또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면서 들은 것처럼 착각한 채 나는 설교자야.’ 하고 큰소리친다. 그런 설교자들 앞에서 회중들의 영혼은 훼손된다. 특히 영혼이 예민한 신자들은 상처를 갑절로 받는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자학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 깊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 은폐성이 하나님 말씀의 속성이다. 앞에서 차창룡 시인의 시를 인용했는데, 다시 이시영 시인의 한 줄로 된 시를 인용하겠다. 제목은 산길이다. ‘밤새워 고라니가 파놓은 흙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셨다이런 결정적인 순간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는다. 고라니가 파놓은 건지 아닌지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시인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다. 눈은 그냥 쌓였다고 말하면 안 되고 쌓이셨다고 존칭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아주 작은 사물과 순간에 대한 시인의 경건한 마음이 마치 기도처럼 바쳐진 것이다. 이런 따뜻하고 세밀하며 심층적인 통찰 없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주장은 허튼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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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2018.02.10 17:49:37

이 세상 모든 이들 중 그런 은폐된 언어의 세계를 세밀하게 통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고, 그 말씀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 사람들만이 사랑의 대상일까요. 화가 나네요....


이 시대의 신학대학은 목회 자가 아닌,

목회 업자를 양산하는 곳이 되어버린 건가요??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면 어찌 저리도 겁대가리(?)들이 없는지....

늘 의아 했었는데..


하나님 말씀이 아닌,

돈과 청중의 환호에 목마른 목사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오늘 목사님 앞에 외람된 막말을 토로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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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8.02.10 22:39:35

용서는 무슨 용서라구요.

겁대가리 없는 설교자들이 많고

거기에 호응하는 신자들도 많으니

그런말 들어 싸지요.

3월8일에 열리는 50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소강석 목사가 설교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밖에 세워도 부끄럽지 않을만한 설교자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밤무대 스타일의 설교자를 선정했다니

유구무언입니다.

교회 정치로 변질된 국가조찬기도회 같은 거

하루빨리 없어지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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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목사 구원(170)

  • 2018-08-25
  • 조회 수 1076

(170) 목사로서 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을 회중들이 예배에서 맛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비유적으로 나는 베토벤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해내는 지휘자이거나 고흐나 조선 화가 정선 등의 그림을 해설하는 사람과 같다. 지휘자는 회중이 아니라 악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음악의 세계에만 충실해야한다. 회중을 위한 연주가 아니라 작곡자의 작품을 위한 연주다. 다른 입장도 가능하다. 작품보다는 그걸 감상하는 독자들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예술에서는 그런 관점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 몰라...

주간일지, 4월29일 [2]

  • 2018-04-30
  • 조회 수 1076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2018년 4월29일, 부활절 다섯째 주일 1) 오늘(4월29일)은 4월의 마지막 주일이자, 금년 들어서 처음으로 맞는 다섯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교우들의 느낌이 서로 달랐을 겁니다. 한 달에 한 번 더 예배를 드리니까 잘됐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너무 자주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다섯 번째 봉사 위원들은 오랜만에 찾아오는 순서라서 자칫 놓칠 수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모두들 자신들의 몫을 잘 감당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설거지 당번을 맡은 분도 있었습니다. 요즘 예배부장 장 집사는 ...

목사 구원(64)

  • 2018-03-30
  • 조회 수 1076

(64) 성경이 말하는 죄는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위, 즉 윤리 자체는 아니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는 굳이 성경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최소한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거부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더 근본적인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 파렴치한 행위는 죄의 결과일 뿐이다.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우리는 아직 아는 게 아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을 성령이라고 하지만 성령을 우리가 다 아는 게 아닌 것처럼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도 다 아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을 죄라고 말...

죽음

  • 2017-07-19
  • 조회 수 1076

7월19일, 수 죽음 지난 설교 성경본문인 롬 8:11절은 아주 인상적이다. 그 구절을 주석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한 셈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우리의 죽을 몸을 하나님이 살린다는 것이다. 즉 ‘죽음과 삶’이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많이 말했지만, 이건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야만 성경이 말하는 ‘삶’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혹은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실존적 고백이다. 만약...

생명의 빛 [1]

  • 2016-12-30
  • 조회 수 1076

12월30일, 금 생명의 빛 예수가 태초의 로고스라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은 예수가 창조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창조는 생명 사건이다. 예수가 창조의 근원이라는 말은 곧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를 생명의 빛이라고 말했다. 태초, 로고스, 생명, 빛이 다 통하는 성서 언어다. 요한복음 기자를 포함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생명의 빛’으로 경험했다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생명 구원이다. 이...

주한미군

  • 2015-09-21
  • 조회 수 1076

9월21일 주한미군 어제 설교 앞 대목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당당한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에 외국군이 분명한 미군이 65년 동안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글에서 한번 짚은 거지만 다시 간략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보겠다. 이 문제는 진보와 보수에 따라서 달라는 게 아니다. 상식이나 비상식이냐에 속한다. 보수에 속한 분들일수록 미군 주둔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보수는 기본적으로 애국심이 강하고 도덕심도 강하고 민족정신도 강하기 때문이...

예수 어록(412) 요 21:12 와서 조반을 먹으라.

  • 2020-09-05
  • 조회 수 1075

예수 어록(412) 요 21:12 와서 조반을 먹으라.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고 한다(11절). 8절에 따르면 다른 제자들이 이미 그물을 끌고 왔다. 서로 다른 전승이 여기서 서툴게 결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베드로가 끌어올린 그물에 큰 물고기가 가득 찼다. 153이라는 숫자까지 나온다. 상징적인 숫자인 153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옛날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는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 회사 사장이 기독교인이었나보다...

시읽기 026 '어느 상형문자'

  • 2018-11-18
  • 조회 수 1075

이시영 '어느 상형문자' https://youtu.be/H8QLOZuVmdI 꿩은 사라지고 그가 남긴 발자국만이 눈밭에 파르르하다

주간일지, 10월29일 file [4]

  • 2017-10-30
  • 조회 수 1074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10월29일, 창조절 아홉 번째,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1) 오늘(10월29일)은 외지에서 오신 손님들로 인해서 예배 분위기가 축제와 같았습니다. 토요일부터 1박을 하신 분들도 있고, 주일에만 오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번쯤은 이렇게 축제 분위기를 곁들인 예배를 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시 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600주년을 약속할 수도 없으니 대구샘터교회 설립 주일인 6월 첫째 주일이 괜찮아 보입니다. 내년이 15주년이 되는 해이군요. 2) 대구성서아카데미...

북핵 문제(4)

  • 2017-09-22
  • 조회 수 1074

9월22일, 금 북핵 문제(4) 남한도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제법 된다. 힘과 힘의 대결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좋게 봐서 북한의 핵 위험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핵무기를 개발할 국법적인 토대가 없다. 핵 개발을 위해서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야 한다.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가 그런 일을 감행할 수는 없다. 당장 수출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런 법적인 문제는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핵무기(전술핵도 마찬가지다)는 우리의 안전을 실...

예수 어록(082) 요 5:22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2019-04-03
  • 조회 수 1074

예수 어록(082)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 이전에도 하나님은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셨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에게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제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처럼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이 강조되...

누가복음 톺아읽기 282

  • 2021-12-01
  • 조회 수 1073

대구 성서아카데미(dabia.net)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 『누가복음 톺아 읽기』 282, 눅 16:1~13 불의한 청지기 비유(2) https://youtu.be/yl2C28uOkrk

누가복음 톺아읽기 225

  • 2021-09-11
  • 조회 수 1073

대구 성서아카데미(dabia.net)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 『누가복음 톺아 읽기』 225, 눅 10:21~24, 예수의 기도(2) https://youtu.be/qPGGv0-Wbcw

루터(17)

  • 2017-10-25
  • 조회 수 1073

10월25일, 수 루터(17) 의(義)는 옳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걸 단순히 도덕적으로 옳은 삶으로만 보면 안 된다. 도덕과 윤리가 의미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적군을 죽이는 목적으로 조직된 군대에 가는 게 옳은지 가지 않는 게 옳은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사형제도가 옳은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동성애 문제를 누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

예수 어록(170) 요 8:19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2019-08-03
  • 조회 수 1072

예수 어록(170) 요 8:19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예수의 확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밀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사태를 요 8:19절은 ‘안다.’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안다는 말은 단순히 정보로 안다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차원에서 일치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안다.’라는 말을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게 좋겠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

예수 어록(398) 요 19:30 다 이루었다.

  • 2020-08-15
  • 조회 수 1071

예수 어록(398) 요 19:30 다 이루었다. 이제 한 인간으로서 예수는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 그의 마지막 발언은 “다 이루었다.”이다. 이 발언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자기 인생이 여기서 다 끝났다는 것인지, 인류 구원을 위한 사역을 마쳤다는 것인지 말이다. KJV은 이렇게 번역했다. “It is finished.” 우리말 번역으로 28절에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을 아셨다고 말이다. 이를 KJV은 “all things were now accomplished.”라고 번역했다. 피니쉬는 일이 끝났다는 의미가 ...

목사 구원(90)

  • 2018-05-05
  • 조회 수 1071

(90) 살짝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다. 지구의 낮은 밝지만 밤이 어두운 이유를 우리는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우주의 팽창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별빛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실감 하기는 어렵다. 지금 이 순간도 밤하늘의 별빛을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가. 다만 그 빛의 밝기가 미미하기에 지구가 어두울 뿐이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 사이의 거리가 자그마치 2광년이니 그럴 만도하다. 빅뱅 순간에 만들어진 흑암물질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

하늘

  • 2017-01-27
  • 조회 수 1071

1월27일, 금 하늘 지난 설교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우주에 관해서 짧게 설명했다. 지구는 태양이라는 별에 속해 있다. 그게 태양계다. 태양은 기특하게도 여러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 별들이 우주에 그렇게 흔하지는 않다. 대개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 혼자다. 그런 곳에는 생명이 가능하지 않다. 태양처럼 행성을 거느리고 있는 별을 우주 물리학자들이 찾고 있다. 우주에 별 숫자가 천문학적으로 많기 때문에 행성을 거느린 별도 제법 많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앞으로 지구에 더 이상 생명...

예수 어록(114) 요 6:32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 2019-05-17
  • 조회 수 1070

예수 어록(114) 요 6: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0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다시 표적을 요구한 뒤에 31절에서 자신들이 가장 특별한 표적으로 여기는 만나를 거론한다.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광야 시절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깊어질 수 있었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만나이기에 이 대목에서 유대인들이 만나를 언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메시아 자격이 있...

물(物) 088- 찔레꽃 file [2]

  • 2022-07-02
  • 조회 수 1069

물(物) 088- 찔레꽃 찔레꽃은 한철 피고 끝나는 게 아니라 피고 지고를 구도자처럼 반복한다. 체스터턴의 멋진 설명에 따르면 자연에서 발생하는 똑같은 현상의 반복은 그런 일을 전혀 지루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 능력이 폭발적이라는 의미다. 얼마 전에 시들어가는 찔레꽃을 사진에 담았다. 미학(aesthetics)이 왜 가능하고 필요한지를 이번에 다시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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