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1일 예수를 팔 자(1)
저물매 그 열둘을 데시시고 가서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14:17,18)
제자 둘을 시켜 유월절 만찬을 준비시킨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을 데리고 그 장소로 갔습니다.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딘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앞에서 제자 둘이 먼저 갔다면 나머지는 열 명일 텐데도 성서 기자는 그런 모순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열둘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구원론적 사건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곧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먹는 자들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축제를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모든 유대인들이 푸짐한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출애굽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 순간에 선생을 배신한다는 말씀이 나오다니요.
“함께 먹는 자”가 팔리라고 했습니다. 먹는 행위는 인간에게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가장 처절하고, 다른 한편으로 가장 숭고합니다. 먹지 못할 때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면 그게 왜 처절한지를 알 것입니다. 굶주림 앞에서 도덕성도 허물어집니다. 함께 먹을거리를 나눔으로써 인간적인 연대가 얼마나 단단해지는가를 알면 그게 왜 숭고한지를 알 것입니다. 함께 먹는 자가 판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서는 가룟 유다라는 한 인물을 죄악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인류 전체를 대표할 뿐입니다. 그에게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들러서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판' 사건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판다'는 것은 내가 '소유한'것을 상대방에게 값을 받고 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팔고자 하는 그것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서는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 무리들과 은 삼십의 거래가 실제로 이루어진 걸 보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에게 스승을 팔 권한이나 자격이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그 권한이나 자격을,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인정했던 걸까요?
예수님이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고 꽁꽁 숨어 있어서 예수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예수의 정체와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대가로 은 삼십을 받았을 수도 있겠으나, 예수님이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상황이고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요..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래가 없더라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제자에게 돈을 치르고 잡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를 잡기 위한 구실이나 명분 같은 게 필요했던 걸까요?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에게 돈을 치르고 샀다'는 것이 그 명분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사건을 이해할 만한 당시의 특별한 사회제도나 관습이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사람을 사고파는...
이 글을 보실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매일묵상'을 하나씩 따라오다가 전부터 해소되지 않은 물음과 관련 있는 묵상글을 만나 댓글로 올려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숨소리 님이 이렇게 구석에 숨어있는 글을 찾아읽어주시니까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요.
가룟 유다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도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가 예수를 은전 30에 팔았다는 게 어색하긴 합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 교회에는 유다에 관한 전승이 있었겠지요.
아마 배교한 자를 대표할 겁니다.
예수 이야기를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해명하는 복음서 기자가
유다 이야기를 스가랴 11:12, 13절에 나오는 '은 삼십'과 연결한 거지요.
마 27:9절에는 예레미야라고 나오는데, 마태의 착각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이야기가 전개되던 당시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한 시절을, 이를 '삶의 자리'라고 하는데,
그리고 기록한 사람의 글쓰기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복된 대림절과 성탄절을 맞으세요.
정목사님의 가롯유다에 대한 또다른 각도의 시각이 성서의 색다른 맛을 즐기게 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연극을 할때, 가롯유다의 죄악성에 맞추어 예수님을 판자로서만 단순히 매도만 했습니다.
생존을 위한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가롯유다는 오늘날의 현실에도 맞아 떨어지네요.
가롯유다는 어떻게 보면 실존주의이면서도 실용주의 모습에 열광하기기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이 쉽게 그려 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