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놀라움 (2)

조회 수 1464 추천 수 22 2007.06.01 08:21:14
2007년 6월1일  놀라움 (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 5:42)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인문학적 성서공부 강의안 중에서 일부를 여기에 게재합니다.
칼 바르트는 신학적 실존을 바로 이런 두려움, 즉 놀라움에서 찾았다. 거의 글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누구나 신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신학에서 손을 떼고 편견 없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놀라움의 경험이 솟아올라서 더 이상 상실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계속 강건해져야 한다. 얼마동안 놀라움을 경험했고 지금은 아무 놀라움도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놀라움의 경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욱 곤란하다. 이러한 놀라움의 경험이 신학자에게 전적으로 낯선 것(그렇게 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우나)으로 남아 있으면 그는 신학 이외의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K. Barth, 이형기 역, 복음주의신학 입문, 76)
외경, 두려움, 놀라움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공포 영화를 보았을 때의 경험이나 군사독재자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는 다르다.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차원을 슬쩍 들여다보았을 때 엄습하는 놀라움이다. 이런 두려움은 오히려 존재의 용기로 작동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신뢰가 가능하다. 이런 경험이 복음서에서는 예수 사건에서 발생했다.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업적과 윤리와 가치들을 폐기시키는 그 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이며, 그의 나라이며, 통치이다. 이런 힘 앞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과 신뢰뿐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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