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인간은 자기가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간혹 동물학자들이 동물에게도 죽음에 대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주장을 하지만 널리 인정받지는 못한다. 이것은 곧 인간만 영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동물도 영적인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과 비슷하다. 뇌 과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영적인 현상을 순전히 뇌 작용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말이 옳은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후자 입장이다. 인공지능이 베르디의 ‘레퀴엠’ 같은 곡을 작곡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한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어쨌든지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만이 소멸을 미리 당겨서 살아냄으로써 한 순간에 불과한 삶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심층적인 깊이로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세례라는 종교의식으로 담아냈다. 예수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났다. 기독교인의 실존에는 죽음과 삶이 내재해 있다. 서로 상충되는 죽음과 삶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이런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고 있겠지만 실감 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예수와의 일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목사에게 가장 부족한 점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 사건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뿐이지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아브라함의 누미노제 경험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경험 없이 자신의 개인기로 목회를 감당하려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내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