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7일 해석 (8)

조회 수 1393 추천 수 16 2007.03.17 13:50:24
2007년 3월17일 해석 (8)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34)

우리가 여러 번에 걸쳐서 나눈 묵상의 제목인 ‘해석’은 성서읽기와 신학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영성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작업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성의 기초는 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성을 단지 고행이나 극기, 또는 도덕적인 성취를 통해서 얻어지는 어떤 초월적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도 어떤 종교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이나 마더 테레사 같은 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 역사에도 그런 방식으로 고도의 영성을 확보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들에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금욕과 고행과 선행은 그 내면에 훨씬 근원적인 영성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행이나 선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들고, 급기야 영성을 말라 죽이고 맙니다. 기독교 영성은 그 무엇보다도 말씀에 중심이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말씀을 정기적으로 읽은 것도 바로 말씀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듯이 구구단 암기가 아니라 해석을 통해서 영성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시도 해석되어야 하고, 음악과 그림도 해석되어야 하듯이 성서말씀도 역시 해석되어야만 그 실질이 우리에게 열립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서읽기에 해석이 있을까요? 해석은 없고 단지 규범과 구호만 있을 뿐입니다. 해석이 있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적용될 뿐이지 사회, 역사, 우주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해석 없이 말씀의 영성은 없습니다.

[레벨:0]두지랑

2007.03.17 22:05:20

목사님의 글 너무도 잘 읽고 있으며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어 외람되이 도움을 청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을 알고 믿는것이다"라고 이해할 때,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개념적 구분과 구체적 의미에 대한 풀이를 듣고 싶습니다. 철학적 개념의 안다(know, wissen)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지요?
지식학에 있어서의 피히테의 이론들이 생각나는군요. 신앙적 정신작용으로서의 믿음 혹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있는 구원을 얻게하는 믿음이 어떻게 인간의 인식능력과 구별되거나 연관되어지는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인지 이해를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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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3.17 23:36:44

두지람 님,
이런 문제를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피히테의 지식학에 대해서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내가 드릴 말씀도 별로 없군요.
아무래도 지금은 그럴 형편이 못되니 한 마디로 끝내는 걸 용서하세요.
앎과 믿음은 모두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우리의 대상이기 때문에 앎과 믿음이 모두 필요하지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겠지요.
처음부터 믿음이 작용하기도 할 거구요.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단계입니다.
대상을 아는 것 없이 믿는다면 그건 광신으로 떨어질 개연성이 높겠지요.
더구나 대상, 그 내용에 대한 인식이 따라오지 못할 경우에
인간의 주관적인 믿음이 풍요로워지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자기확신,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요?
두지람 님의 질문은 앎과 믿음보다는
계시와 인식의 관계가 더 타당할 것 같네요.
좋은 주일!

[레벨:0]두지랑

2007.03.18 01:26:05

감사합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계시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세계 또는 내 의식 속으로 관심을 끌며 등장할 수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계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 관심을 갖게 되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겠지요.

믿는다는 것은 앎을 속성으로 합니다. 알지못하는 것을 믿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지요. 어떤 사람을 사랑부터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사귀어가면서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경우 말입니다.

인문학적인 지식과 신앙적 믿음 사이에는 폭이 좁은 다리가 놓여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내어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학적으로 풀어내어 하나님의 계시로 세워나가는 사람 두사람은 모두 같은 다리 위에 서 있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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