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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9일 비유와 예수의 정체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막 4:33)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게 이상하지요?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을까요? 못하신 건가요, 안하신 건가요?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은 직접 본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실체를 직접 보았다면 그것을 그대로 말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요즘 천국을 직접 보았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질문을 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을까요? 이 말이 신성모독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아주 어려운 사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게 무엇인지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게 서로 모순입니다. 주체와 객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 모순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모순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한 마디만 설명한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구별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와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구별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일치하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비유의 가르침은 예수의 신성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는지요. 공연히 어렵게 말을 했군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막 4:33)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게 이상하지요?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을까요? 못하신 건가요, 안하신 건가요?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은 직접 본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실체를 직접 보았다면 그것을 그대로 말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요즘 천국을 직접 보았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질문을 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을까요? 이 말이 신성모독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아주 어려운 사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게 무엇인지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게 서로 모순입니다. 주체와 객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 모순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모순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한 마디만 설명한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구별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와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구별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일치하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비유의 가르침은 예수의 신성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는지요. 공연히 어렵게 말을 했군요.
많은 기독교 인들이 과학을 그것도 진화론 주의자를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도리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기가 쉬워 졌습니다. 저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를 칼세이건의 4차원 해석에서 힌트를 얻어서 이해했습니다 -- 그렇다고 하나님꼐서는 4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 그건 저도 모르니깐요. 감히 제가 어찌 하나님을 다 보았다고 하겠습니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보면 4차원적인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3차원에 사는 사과가 2차원 (평명)에 사는 세모를 방문한다고 봅시다. 사과를 평명에 갖다 대면은 세모는 갑자기 한 점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겁니다. 그것도 밀폐된 공간에서도요. 그리고 사과가 점점 내려가면 그 모습은 평면에 점에서 부터 시작해서 원이 되겠지요. 3차원 존재인 제가 만약 손가락 하나를 평면에 대면 저는 하나의 모습이 되겠지요. 그러나 손가락 두개를 대면은 두 손가락은 분명히 2차원에서 보면 별개의 것이나 3차원에서 보면 다 같은 제 손의 일부분이겠지요.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다른 존재이시면서 또 같은 존재 아닐까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보면 4차원적인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3차원에 사는 사과가 2차원 (평명)에 사는 세모를 방문한다고 봅시다. 사과를 평명에 갖다 대면은 세모는 갑자기 한 점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겁니다. 그것도 밀폐된 공간에서도요. 그리고 사과가 점점 내려가면 그 모습은 평면에 점에서 부터 시작해서 원이 되겠지요. 3차원 존재인 제가 만약 손가락 하나를 평면에 대면 저는 하나의 모습이 되겠지요. 그러나 손가락 두개를 대면은 두 손가락은 분명히 2차원에서 보면 별개의 것이나 3차원에서 보면 다 같은 제 손의 일부분이겠지요.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다른 존재이시면서 또 같은 존재 아닐까요?
비유법에는 직유와 은유가 있습니다.
논리는 현실을 응축하는 힘이 있지만 믿음은 논리를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으로서의 믿음은 현실속에서 또다른 가상의 세계 혹은 이데아의 세계 혹은 관념의세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뛰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직유법에서 은유법으로 뛰어들어가는 것 처럼.
동일한 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그냥 '나의 고민을 풀어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면 될 것을 '당신은 마치 마술사처럼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라고 표현하거나' 당신은 나의 해결사입니다'라고 표현한다면 그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겠지요.
다른하나는, 주체와 객체의 합일에 관한 문제인데 이 또한 인식론적 전제와 동일한 사유과정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다르게 표현하면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어지는 나'는 구별되어져야만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죠.동일한 내가 구분되어지지 않는다면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이렇게 구분되고 구별되어진 내가 실체적 존재로서의 나 안에서는 종합적으로 하나인 것이죠. 서로 구분된 다른 나 이지만 내안에서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른 뭐 그런 것 아닐까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사실 신앙의 대상으로 핵심적인 부분인데 그것을 제대로 규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아들이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다만 나이가 듬에 따라 자신도 아버지 뒤를 따라 아버지의 자리에 앉게되고 아버지가 되어갈 뿐이겠죠.
논리는 현실을 응축하는 힘이 있지만 믿음은 논리를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으로서의 믿음은 현실속에서 또다른 가상의 세계 혹은 이데아의 세계 혹은 관념의세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뛰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직유법에서 은유법으로 뛰어들어가는 것 처럼.
동일한 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그냥 '나의 고민을 풀어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면 될 것을 '당신은 마치 마술사처럼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라고 표현하거나' 당신은 나의 해결사입니다'라고 표현한다면 그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겠지요.
다른하나는, 주체와 객체의 합일에 관한 문제인데 이 또한 인식론적 전제와 동일한 사유과정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다르게 표현하면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어지는 나'는 구별되어져야만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죠.동일한 내가 구분되어지지 않는다면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이렇게 구분되고 구별되어진 내가 실체적 존재로서의 나 안에서는 종합적으로 하나인 것이죠. 서로 구분된 다른 나 이지만 내안에서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른 뭐 그런 것 아닐까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사실 신앙의 대상으로 핵심적인 부분인데 그것을 제대로 규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아들이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다만 나이가 듬에 따라 자신도 아버지 뒤를 따라 아버지의 자리에 앉게되고 아버지가 되어갈 뿐이겠죠.
한계적인 언어와 경험으로 규정해버리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본질" 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예수는 하느님을 완전히 가졌고, 하느님 속에서 헤엄치면서 살았지만, 또한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규정할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도 개별 인간으로서, 그 한계성 속에서 하느님을 표현해야 했기에...
비유나 시적인 표현은 더 많은 것을, 더 완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