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7일, 월
마종기의 시(6)
상처 5
나이 탓이겠지만 요즈음에는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피가 많이 흐른 것도 아니고
심하게 다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상처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세포들은
자꾸 머리를 부딪히며 소리 죽여 운다.
나이 탓이겠지만 남들의 상처도
전보다 쓸데없이 더 잘 보인다.
피부를 숨긴 공포의 빠른 도주도
가슴까지 흔들며 분명하게 보인다.
무자비한 욕망이 표정 죽이고
우리 사이에 집과 공장을 짓는다.
나는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기적의 알약은 커지기만 하고
주위를 날아다니는 공기의 입들이
사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떠들며
살충제의 바람을 만들어 주위에 뿌린다.
그래도 피나지 않는 마지막 것을
언제나 두 손에 들고 사는 너.
*마종기의 이 시는 늙음의 미학을 노래하는 것으로 들린다. 늙은 육체의 상처는 잘 낫지 않는다. 상처가 아물다가도 다시 덧난다. 그걸 마종기는 세포들이 ‘소리 죽여 운다.’고 표현한다. 실감이 가는 표현이다. 젊은 시절에는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늙는다는 것은 모든 것에 예민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우는 소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걸 예민하게 느끼는 것은 아름답다.
사람은 육체의 상처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산다. 다른 사람이 마음에 입은 상처를 마종기는 늙어가면서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런 상처를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마종기의 눈에는 ‘가슴까지 흔들며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상처는 세상살이에서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 실존의 한계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인간에게는 있다. 그것이 있기에 인간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더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마종기는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하는 주위의 언사들을 ‘살충제의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 아니 상처의 아픔을 덧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게는 ‘피나지 않는 마지막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겠다. 시인가, 신인가, 사랑인가. 상처받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는 하는데, 시인 혼자만 알고 있는 어떤 것이리라. 그걸 두 손에 들고 있는 ‘너’는 바로 시인 자신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