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489
2007년 3월12일 해석 (3)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34)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했다는 본문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은 비유만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해석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게 옳지만(레 19:18)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틀린 걸까요? 아닙니다. 구약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의 가르침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상황에서도 그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율법을 변할 수 없는 규범으로만 다루었을 뿐이지 해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자들과 교회 교사들도 이런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이지만 그 당시의 용어와 개념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서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죽습니다.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모든 말씀을 이 시대의 사조에 맞도록 바꿔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컨대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적인 조건에서 나온 것이니까 하나님 ‘어머니’라고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사도신경의 몇몇 대목이 오늘의 과학관에 맞지 않으니까,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라는 표현이 맞지 않으니까 현대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전통을 그런 식으로 쉽게 바꾸기 시작하면 아마 멀지 않아 가시만 남은 생선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리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34)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했다는 본문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은 비유만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해석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게 옳지만(레 19:18)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틀린 걸까요? 아닙니다. 구약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의 가르침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상황에서도 그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율법을 변할 수 없는 규범으로만 다루었을 뿐이지 해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자들과 교회 교사들도 이런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이지만 그 당시의 용어와 개념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서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죽습니다.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모든 말씀을 이 시대의 사조에 맞도록 바꿔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컨대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적인 조건에서 나온 것이니까 하나님 ‘어머니’라고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사도신경의 몇몇 대목이 오늘의 과학관에 맞지 않으니까,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라는 표현이 맞지 않으니까 현대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전통을 그런 식으로 쉽게 바꾸기 시작하면 아마 멀지 않아 가시만 남은 생선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리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평신도 교회'나 '대안 교회' 같은 공동체를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지요.
향 후 몇 십년,혹은 몇 백년이 지나간 싯점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