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의 신학 이야기(12)

조회 수 2525 추천 수 1 2011.02.04 23:18:39

사도들은 ‘역사적 예수’나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았거나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알고 믿은 바는 구체적인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였으니,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이 믿지 않았을 때에도 이들을 만나셨고 이들이 믿을 수 있게 된 후에도 이들을 만나주신 분이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던 사도들에 의한 추상도 아니고, 믿은 후의 사도들의 추상도 아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눈이 부활사건에 의하여 떠져서 부활 전에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던 그분이 누구신가를 말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역사 비평적’ 전제를 갖지 않고 신약성경을 읽어 들어갈 경우에도 이중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 전과 후의 두 종류의 그리스도- 이 산약성경 문서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역사 비평학’의 관점에서 조차도 이러한 분리는 미심쩍은 작업이다.(49)

 

     20세기 초에 제기된 신학적 이슈의 하나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였소. 복음서를 연구한 학자들의 설명에 따라면 이 두 요소가 분명히 구분된다는 거요. 역사적 예수는 말 그대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젊은 유대인 남자를 가리키오. 예수 세미나 그룹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역사적 예수요. 기독교가 이 역사적 예수를 놓치고 지나치게 교리적인 그리스도로 치우쳤다는 비판이오. 교리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앙의 그리스도, 또는 부활 후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자연인 예수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된 그리스도를 가리키오. 복음서는 이런 전(前)이해에 근거해서 기록된 것이오. 슈바이처 박사는 이 문제를 이미 분명하게 정리했소.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없다고 말이오. 바르트는 이 논쟁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돌리고 있소. 초기 그리스도교 증인들에게는 이런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는 거요. 역사와 신앙이 하나를 이루었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예수 그리스도 경험이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것이오. 바르트에게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논쟁은 부질없는 것이오. 나도 동의하는 바이오. (2011년 2월4일, 금)


[레벨:5]신마적

2011.02.05 14:47:49

교수님 그러면 한가지 질문이 생기는데요...

판넨베르크가 예수: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저작물로 되게 유명해졌잖아요.

거기서 판넨베르크는 위로부터의 기독론(바르트와 불트만)을 비판하고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주장하면서 부활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고 했잖아요(제가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그런 내용인 것으로 알고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교수님 개인적인 입장은 어떠신가요?

그리고 판넨베르크의 예수: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책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것 같네요.

유명한 책인것 같은데 판넨베르크의 책이 어려운것도 있지만 한국에는 상대적으로 덜 소개된 신학자인것

같기도 하고...

[레벨:16]안희철

2011.02.05 22:47:33

판넨베르크에 대해서는 "덜" 소개되었다기 보다는 "잘못" 소개되었다는 표현이 맞을겁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미 영어로도 대부분 번역되었는데 말이죠.


제가 좀 거들자면,


판넨베르크는 위로부터의 기독록을 비판하거나 혹은 무시한 게 아니구요,

그것"만"을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던 겁니다.

지금 밖이라... 말씀하신 "기독론의 근본특징"이란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조직신학 2권에 보면요,

두가지 기독론적 방법론이 상호 보완적이라고(komplementär im Verhältnis zueinander, STh II, p. 327) 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강조한 것은

단지 "방법론적"으로만 우선성이 있다는 의미이지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무시한 결과는 아니구요.

심지어 이런 말을 했네요:

"성육신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로 존재했던 '영원한 아들'이 그 본질적 우선성을 갖는다"고요.

신학적 방법론으로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펼쳐가야 하지만

그것이 이루는 과제는 도리어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확증인 셈이겠네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1.02.06 23:51:10

신마적 님,

위로부터, 아래로부터라는 구분은 큰 의미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하는 신학은 모두 위로부터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에는 물론 판넨베르크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구분이 나름으로 어떤 신학적인 사태를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됩니다.

역사만 하더라도 바르트에게는 원역사일 뿐이고,

불트만에게는 실존적 역사일 뿐이라고 한다면,

판넨베르크에게는 보편적 역사라는 구분이 가능한 거지요.

이 보편적 역사를 신학의 자리로 한다면

당연히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말을 들을만 합니다.

(역사적) 이성으로 예수 사건을 잘 살피면

예수의 부활을 비롯한 그의 메시아적 운명이 확실히 드러난다고 보는 거에요.

불트만에게는 그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 되구요.

그것이 실존 안으로 해체되고 마는 거지요.

그런데 위 대글에서 불트만의 기독론이 위로부터라고 했는데,

그런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나도 판넨베르크 신학을 손에서 놓은지 오래 돼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네요.

내 개인적인 생각이요?

아,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것 말이죠?

판넨베르크의 이런 주장을 오해하면 곤란해요.

그건 실증적인 역사 사건이 아니에요.

판네베르크가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우리가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것과 비슷한 차원의 사건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역사개념' 안에서 통하는 말이에요.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판넨베르크의 역사개념을 전제해야 합니다.

역사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아니잖아요.

그걸 설명해달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렇게만 정리할 테니 알아서 생각하세요.

<예수의 부활은 보편사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증명될 수 있다.

그 작업이 신학이다.>

설 연휴도 끝났으니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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