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경험과 시원성(4)

조회 수 998 추천 수 0 2017.08.18 21:06:34

호모 에렉투스

한국교회에서는 창조론이 오해되기도 하고 독단에 빠지기도 한다.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긴다. 소위 말하는 창조 과학이 기독교 창조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기에도 스펙트럼이 넓기는 한데, 가장 극단적인 입장은 젊은 지구론이다.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지구가 6천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는 마치 지구를 평평한 것으로 보는 것과 비슷한 시각이다. 비전문가들에게는 전문적인 것처럼 보이는 과학 용어와 개념을 나열하면서 진화론이 틀렸고, 성경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전파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개혁적인 교회 중에서도 창조 과학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신학적으로 미숙하다는 증거다. 창세기가 말하는 6일 창조도 그대로 믿을 것이다. 이런 전근대적 행태에 근거해서 교회 밖의 안티 기독교 세력은 기독교를 비판한다. 거기에 반대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다시 격렬하게 자연과학을 비난한다. 젊은 지구론에 의하면 공룡시대도 부정되고, 구석기와 신석기도 부정된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유인원들도 부정된다. 호모 에렉투스(직립원인)에 대한 사전의 설명이다.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살던 멸종된 화석인류로 160만 년 전부터 25만 년 전까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였으며, 아직도 상당한 논란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의 직계조상으로 간주된다.” 나는 진화의 역사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증거라고 믿는다. 진화에 시원적 깊이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직립원인에 한정해서 살펴보겠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즉시 서서 걷지 못한다. 일정한 기간 누워 있다가, 힘이 생기면서 엎드리기도 하고 기다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선 다음에 발걸음을 조금씩 옮긴다. 더 먼 시간으로 가면 어머니 자궁의 양수에 떠 있다가 세상에 나와서 두 발로 걷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이 인간 진화의 긴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벼랑 위의 포뇨라는 만화영화에서, 주로 앞부분에서 이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포뇨는 푸른 바다에서 찾아왔어요.’라는 노래가 배경으로 나온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네 발을 사용하다가 두 발로 서게 되는 진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질학적 우연이다.

원래 사람과 침팬지의 공동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다른 동물과 경쟁하면서 살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동부와 서부에 지질학적 격변이 일어났다. 서부는 여전히 밀림이 계속되었고, 동부는 평야로 바뀌었다. 서부와 동부 사이에 높은 지대가 형성되어서 왕래가 쉽지 않았다. 동부에 머물게 된 이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노출되었기 때문에 다른 포식자들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제는 네 발로 기어 다니지 않고 두발로 서게 되었다. 두 발로 서면 일단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에 포식자들의 접근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진화의 과정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겠지만 직립원인이라는 정체성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직립원인이 된 다음에는 인간의 특징은 비약적으로 진화되었다. 뇌의 용량이 늘어나게 되었고, 성대가 자유로워져서 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 이것은 인간의 시원적 깊이를 가리킨다. 까마득한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선다는 것을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사건이다. 로봇 연구자들이 해결해야 할 핵심이, 어쩌면 해결 불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로봇의 직립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로봇 개발자들이 만든 로봇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로봇의 움직임이 우리에게는 유치하게 보인다. 힘은 우리보다 강하지만 세밀하지 못하다. 평지에서 걷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더더욱 힘들다. 언젠가 로봇의 기능이 더 발전하면 피겨스케이팅을 할 줄 알거나 테니스 시합을 할 줄 알게 될까?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리라고 본다. 농사일을 보자. 지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기계 혼자서 할 수 있는 없다. 인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제로는 기계가 못하는 일도 많다. 과학이 더 발전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임계점을 로봇이 넘을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알파고가 바둑 시합에서 인간 최고수를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자동차와 사람이 달리기 시합을 할 수 없는 거와 같다. 사람이 계산기를 당할 수 없는 거와 같다. 공정하게 시합을 하려면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것이나 시동을 거는 일도 사람이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 알파고를 대신해서 사람이 바둑돌을 놓지 말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베이스를 다른 데 두지 말고 바둑을 두는 현장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한 시합이 된다.

사람이 선다, 또는 달린다는 말은 지구 중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중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직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지럼증이 있는 사람은 쓰러지는 법이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보라.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걷는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된다. 어른이 아이에게 중심 잡는 법을 이론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아이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 발자국을 걷다가 차츰 늘어나 옆에서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엄마를 졸졸 따라다닐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뛸 수 있게 된다. 기어 다니던 아이에게 걷고 뛰는 건 삶의 비약이다. 16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에게 일어났던 일이 지금 이 아이에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걷는 데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걷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안다. 언젠가 우리도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이전까지 걷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게 좋다. 사실은 걷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이 다 존재의 기쁨에 속한다. 인간에게 이런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더 시원적인 일은 없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시원적인 것은 존재론적인 능력이다. 빈부귀천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런 인식이 가능한 사람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누릴 줄 모른다. 천민자본주의 이념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돈으로 환산되는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건강을 위해서 걷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걷고 운동하는 것마저 그것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일종의 투자 개념이다. 혼자서 일단 바르게 서는 연습을 해보라. 온 몸으로, 주로 발바닥에 중력을 느낄 것이다. 중력을 느끼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시원적인 것이다. 지구와 몸으로 교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교감! 섹스도 기본적으로 몸의 교감에 의한 희열이다. 지구와의 교감을 통해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시원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현대인은 걷기의 시원적 차원을 놓치고 산다. 지구와의 교감보다는 기계와의 교감에 더 익숙하다. 걸으면서도 스마트 폰에 존재를 맡기고 있으니 어찌 걷기의 영성에 들어가겠는가.

나는 걷는다1,2,3권은 기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프랑스 남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터키 이스탄불에서부터 중국 시안까지 12,000킬로미터를 자기 발로 걸은 이야기다. 나중에 프랑스 리옹에서 베로나까지 900킬로를, 그리고 베로나에서 이스탄불까지 2,000킬로를 더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다. 거기에 가기 전에 국내만이라도 좀 걸어야하지 않을는지. 불교 수도승들이나 기독교 수도사들도 걷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걸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일단 걸을 수 있는 건강이 필요하다. 다음은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 걷는 것 자체에 목표를 둬야지 다른 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된다. 아니 여기에는 목표 자체가 없어야 한다. 가장 극단적인 순례에는 삼보일배, 오체투지가 있다. 이런 순례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게 된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순전하게 그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다른 그 어떤 것이 제공할 수 없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 의식이야말로 시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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