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죄와 용서

조회 수 1368 추천 수 21 2006.12.19 07:23:04
2006년 12월19일 죄와 용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막 3:28)

그리스도교의 인간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죄라는 대답을 할 겁니다. 물론 성서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지적이 많기는 합니다. 이미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건,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싹쓸이 하려고 마음먹을 정도로 부패했던 사람들에게 관한 이야기가 모두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으며, 그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의 죄에 대한 성서의 증언들을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성서의 증거들을 찾기 이전에 우리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죄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몽된 이 사회에서도 매우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불의가 만연하고 폭력과 반(反)폭력이 악순환이 숙지지 않습니다. 저 자신의 삶도 내외적으로 죄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서와 신학은 죄보다는 사죄의 은총에 근거해서 인간을 조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고 진술했습니다. 여기서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죄는 결국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능력을 잃습니다. 매튜 폭스는 전통적인 타락/속량 영성을 창조 중심의 영성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단 옳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체가 아니라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죄보다 창조와 은총과 해방이 상위개념이라는 점을 바르게 해석해내야겠지요.

바우로

2006.12.19 14:39:51

성공회 사제인 매튜 폭스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셨군요. 그래서 더 정선생님의 글이 반갑습니다. 대림절동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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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4일 씨 (2) [3]

  • 2007-01-14
  • 조회 수 1276

2007년 1월14일 씨 (2)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막 4:3) 씨 뿌리는 행위가 곧 예배라는 어제의 말을 뒤집으면, 예배는 곧 씨 뿌리는 행위와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철저하게 자연에 깃든 생명의 능력을 의지하듯이 예배도 역시 철저하게 자신과 구별되는 영에 의존합니다. 그 영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인 성령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들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예배의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예배의 주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사람이...

1월13일 씨 (1)

  • 2007-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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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13일 씨 (1)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막 4:3) 예수님은 출가하기 전에 분명히 목수로 살았을 겁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보면 유대의 무장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그 십자가를 만든 인물이 예수님으로 그려집니다. 작가의 재미있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면입니다. 그 사형수의 어머니는 예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습니다. 당신도 결국 내 아들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리라! 어쨌든지 목수로 생계를 유지하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목수 일과 연관된 말씀을 전혀 하지 ...

1월12일 예수의 비유 (4) [1]

  • 200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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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12일 예수의 비유 (4)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막 4:2)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 한 마디 하려다가 나 스스로 빠져나오기 힘든 신학적 사유 안에 갇히고 말았군요. 대충 정리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신학적 개념 안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타자성과 내재성의 변증법적 관계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타자성만 강조하게 된다면 예수의 신성은 존립될 수 없습니다. ...

1월11일 예수의 비유 (3) [1]

  • 200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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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11일 예수의 비유 (3)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막 4:2) 예수도 하나님의 실체를 완전히 알지 못했다는 말이 많은 분들에게 당혹스럽게 들릴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요? 만약 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훗날 교정하도록 하고, 일단 이런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도대체 예수가 하나님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

1월10일 예수의 비유 (2) [3]

  • 200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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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10일 예수의 비유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막 4:2)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고, 하나님을 직접 본 분인데 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을 간접적인 방식인 비유로 가르치셨을까요?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는 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적으로만, 암시적으로만, 간접적으로만 가르쳤을까요? ...

1월9일 예수의 비유 (1) [1]

  • 2007-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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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9일 예수의 비유 (1)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막 4:2) 예수의 가르침은 주로 비유의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구약성서에 대한 재해석이나 간단한 경구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비유로 진행되었었습니다. 비유는 어떤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는 가르침의 내용이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우리는...

1월8일 예수의 가르침 (5)

  • 2007-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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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8일 예수의 가르침 (5)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막 4:1) 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화두(話頭)가 가르침과 배움의 매우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스승이 제자에게 말의 머리만 제시하고 제자가 스스로 깊은 사유를 통해서 어떤 깨우침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콩놔라팥놔라 하고 일일이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제자가 생각할 수 있는 방향만 제시한...

1월7일 예수의 가르침 (4)

  • 200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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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7일 예수의 가르침 (4)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막 4:1) 가르침은 배움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돼지 앞의 진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히 진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참된 배움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선입관이 배움을 방...

1월6일 예수의 가르침 (3)

  • 200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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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6일 예수의 가르침 (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막 4:1) 오늘 본문에 “큰 무리”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중성이 있었다는 뜻일까요? 그런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대중성 여부보다는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청중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일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유익한 일이 ...

1월5일 예수의 가르침 (2)

  • 200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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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5일 예수의 가르침 (2)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막 4:1) 예수님은 좋은 선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와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진리 자체에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선생은 늘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습니다. 그는 당연히 청중을 기만하지도 않고 선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지 진리의 물결에 자신을 맡길 뿐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

1월4일 예수의 가르침 (1) [1]

  • 200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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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4일 예수의 가르침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막 4:1) 마가복음 기자는 3장 뒷부분에서 매우 살벌했던 장면으로부터 껑충 뛰어넘어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으로 독자들을 인도합니다. 앞 대목은 분명히 바알세불, 용서받지 못하는 죄,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이냐 등등, 상당히 격한 분위기였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본문의 장면은 분명히 앞의 장면과 대조적입니다. 그 장소...

1월3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5)

  • 2007-01-03
  • 조회 수 1383

2007년 1월3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범주를 어디에 놓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교회에 나와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것과 상관없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 등등, 누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일까요? 하나님의 뜻과 실천을 조금 예민한 문제와 연관해서 생각해볼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타종교입니다. 불교인들 중에서 매우 성실한 사람, 실제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

1월2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4)

  • 200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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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2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4)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인식과 행위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만 그럴듯하게 할 뿐이지 실제로 행동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합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게 많을수록 손발이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종 이...

1월1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3)

  • 2007-01-01
  • 조회 수 1526

2007년 1월1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3)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문이 막힙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일까요? 아무도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례 받을 때 배운 대답을 알기는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종말에 이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십...

12월31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2)

  • 2006-12-31
  • 조회 수 1530

2006년 12월31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2)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제 교회 공동체가 소중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이 곧 교회라는 형식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과거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

12월30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1)

  • 2006-12-30
  • 조회 수 1456

2006년 12월30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1)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31-35절의 결론이 바로 35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의 가족입니다. 가족 개념이 혈연공동체로부터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전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걸 오늘에 적용한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

12월29일 혈연 공동체

  • 2006-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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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29일 혈연 공동체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4) 자기를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일단 접어두고 예수는 자기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1” 가족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혈연의 가족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이지만 우리 한민족처럼 혈연 공동체를 강조하는 민족도 이 세상에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피는 물보...

12월28일 신앙공동체와 가족공동체

  • 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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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28일 신앙공동체와 가족공동체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3)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은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뒤의 두 구절에서 조금 더 냉정한 말씀을 하지만 이미 이 구절에서도 예수님은 상식적이지 않은 발언을 하신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면서 가족과의 연(緣)을 완전히 끊었는지 모릅니다. 승가에서도 출가한 사람들은 집안 식구들과의 세속적인 관계를 버리고, 가톨릭의...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 2006-12-27
  • 조회 수 4637

2006년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2) 예수를 찾으러온 가족 중에는 어머니 마리아만이 아니라 동생들과 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동생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제법 여러 명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 이외에도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한 동생들이...

12월26일 당신의 어머니 (4) [1]

  • 2006-12-26
  • 조회 수 1530

2006년 12월26일 당신의 어머니 (4)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2) 우리 개신교회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마리아가 이미 신의 영역에 들어간 것 아니냐,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제가 지금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할만한 입장은 아닙니다. 실제로 마리아를 대상으로 하는 기도인지, 아니면 주님에게 대신 아뢰어달라는 요구인지 찬찬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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