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금
놀람과 조롱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성령강림 현상을 목도한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두 가지로 묘사했다. 하나는 놀람이며, 다른 하나는 조롱이다. 이것은 오순절 당시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늘 반복되던 것이었다. 오늘날도 같다. 같아야 한다. 같지 않으면 뭔가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1) 교회는 놀라움을 자아내는 공동체다. 교회당을 화려하게 건축하는 걸로 사람들이 놀라면 곤란하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당이 수두룩하다. 건축물도 그렇고, 교인 수에서도 그렇다.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앞으로는 그런 걸로 세상이 놀라지도 않는다. 교회가 놀라움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교회가 종말론적 지평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비유로 나오는 하나님 나라 표상을 보라. 예컨대 포도원에서 1시간 일한 사람과 10시간 일한 사람이 동일한 일당을 받는다. 세상의 종말론적 변혁을 교회가 외치고 실천해나갈 때 세상은 교회를 놀라워한다.
2) 동시에 교회는 조롱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예로 든 비유만 해도 그렇다. 저걸 외치면 세상은 교회를 조롱한다. 술에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군댈 것이다. 이런 조롱은 받을수록 좋다. 사실 정신이 너무 말짱한 것도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뭔가에 취하기 마련인데, 이왕이면 성령에 취해서 살면 오죽 좋겠는가. 현실 교회는 이런 조롱을 무서워한 채 자기의 성채에 숨어 있다. 있으나 없으나 세상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짠맛을 잃은 소금 아닌가. 칼 브라텐의 말이다. ‘교회가 스스로의 정서적, 또는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때 하나님 나라의 문은 교회에서 차단되고 만다.’(신의 미래, 173쪽).
공감합니다. 교회가 눈쌀을 찌프리는 일로 조롱을 받지 말고
저들이 이해할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로
부러움 섞인 시기와 질투의 조롱을 받는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