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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1월19일 예수님의 일

  • 2006-11-19
  • 조회 수 1381

2006년 11월19일 예수님의 일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막 3:8)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온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주로 장애인과 질병 치유, 또는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다툰 것이나, 또는 몇몇 가르침들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가장 타당한 대답은 이런 일련의 일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

11월18일 많은 무리

  • 2006-11-18
  • 조회 수 1633

2006년 11월18일 많은 무리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막 3:8) 7절에 의하면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으며, 8절에 의하면 남쪽과 중부의 여러 지역에서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나왔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거론되지 않았는데,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공생애 출발지인 갈릴리 호수 근방만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전체를 망라한 ...

11월17일 “Nachfolge Christi”

  • 2006-11-17
  • 조회 수 2168

2006년 11월17일 “Nachfolge Christi”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막 3:7) 예수님이 사람들을 떠나서 물러가실 때 제자들만은 함께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로 얼마 후에 열두 사도로 임명받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제자도(道)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 또는 신앙고백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11월16일 부정의 길 (2) [1]

  • 2006-11-16
  • 조회 수 1562

2006년 11월16일 부정의 길 (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막 3:7) 매튜 폭스는 <원복>(Original Blessing, A Primer in Creation Spirituality)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영성을 네 가지 구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Via Positiva(긍정의 길), Via Negativa(부정의 길), Via Creativa(창조의 길), Via Tranaformativa(변모의 길)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구조인 비아 네가티바는 바로 무(無)를 받아들이는 영성, 즉 부정의 길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매튜 폭스의 진술...

11월15일 부정의 길 (1) [2]

  • 2006-11-15
  • 조회 수 1448

2006년 11월15일 부정의 길 (1)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막 3:7) 바리새인들과의 한차례 대회전이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바다(갈릴리 호숫가)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호숫가로 물러가신 이유는 한편으로는 신변의 위협을 잠시 피해보실 요량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 습관대로 움직이신 것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지 그 순간만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해보려고 한 것은 분명합니다. 주로 사람들이 없는 광야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저자거리에서 하나...

11월14일 예수제거 음모 (3)

  • 2006-11-14
  • 조회 수 1617

2006년 11월14일 예수제거 음모 (3)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바리새인들은 헤롯당 사람들과 의논했습니다. 그 주제는 예수를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의논은 필요합니다. 그게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 데로 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의논은 민주적 질서의 초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의논이라는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의논해서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늘 그런 것은 ...

11월13일 예수제거 음모 (2) file

  • 2006-11-13
  • 조회 수 1474

2006년 11월13일 예수제거 음모 (2)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말입니다. 그거야 어쩌겠습니까? 오늘도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다툴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뒤에서 음모...

11월12일 예수제거 음모 (1)

  • 2006-11-12
  • 조회 수 1340

2006년 11월12일 예수제거 음모 (1)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바리새인들이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죽일 의논을 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를 매우 심란하게 만드는군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아무나 죽이고 싶어 하는 불한당이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정도로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는 성서의 진술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님의 공생애 ...

11월11일 바리새인과 헤롯당

  • 2006-11-11
  • 조회 수 2494

2006년 11월11일 바리새인과 헤롯당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회당 안에서의 일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보내는 무언의 압력을 무시하고 손 마른 사람을 고쳤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이제 걸려들었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을까요, 아니면 뭐 저런 친구가 있어, 우리를 물로 보는 거야 뭐야, 하고 속상해했을까요. 그들의 속이야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회당에서 나가 헤롯당과 공모하기 시작했다고 사실이 중요합니다. 원래 ...

11월10일 손을 내밀매

  • 2006-11-10
  • 조회 수 1515

2006년 11월10일 손을 내밀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마술인가요, 기적인가요. 이 문장에 대한 역사비평은 오늘 그만 두고, 큐티 방식으로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찾아봅시다. 오늘 우리에게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첫째, 마른 손을 내밀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에 ...

11월9일 만인구원과 선택구원

  • 2006-11-09
  • 조회 수 1870

2006년 11월9일 만인구원과 선택구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어제의 큐티에서 저는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구원의 보편성을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있겠군요. 제가 보기에 만인구원론과 선택구원론이 무조건 대립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성서는 이 양자를 모두 배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인...

11월8일 믿음 없는 구원? [2]

  • 2006-11-08
  • 조회 수 1826

2006년 11월8일 믿음 없는 구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손 마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과연 그에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어제 제가 말씀드린 그런 기독론적인 믿음이 있었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알았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마...

11월7일 손을 내밀라.

  • 2006-11-07
  • 조회 수 1422

2006년 11월7일 손을 내밀라.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예수님은 이제 바리새인들과의 승강이는 접어두고, 아니면 그들에게 보란 듯이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들에는 여러 형식이 있습니다. 말씀이나 기도로, 또는 접촉을 통해서, 또는 어떤 극적인 행위를 통해서 치유하셨습니다. 어떤 형식이었든지 핵심은 예수라는 인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11월6일 생명과 법 (3)

  • 2006-11-06
  • 조회 수 1735

2006년 11월6일 생명과 법 (3)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앞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일종의 법실증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안식일 법을 문자적으로 수호하는 것에만 모든 것의 무게를 놓는 신앙적 태도가 바로 완악한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11월5일 생명과 법 (2)

  • 2006-11-05
  • 조회 수 1444

2006년 11월5일 생명과 법 (2)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어제 저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사랑으로 신앙의 초석을 옮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진술은 많은 보충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원칙적으로 율법도 사랑을 폐기하지 아니며, 사랑의 법이라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 구체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늘 신앙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고 구체적으로 적용시켜나가야 할 것 같...

11월4일 생명과 법 (1)

  • 2006-11-04
  • 조회 수 1485

2006년 11월4일 생명과 법 (1)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성서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탄식하셨다고 합니다. 완악하다는 이유는 손 마른 사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을 고발할 빌미를 찾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운명보다는 (안식일) 법의 수호가 더 중요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완악한 마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안식일 법을 수호...

11월3일 예수님의 화 [2]

  • 2006-11-03
  • 조회 수 1730

2006년 11월3일 예수님의 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우선 짤막한 본문 비평이 필요한 대목이군요.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이 저들의 완악한 마음을 탄식하셨다는 문장이 먼저 나온 뒤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는 문장이 뒤를 따르고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그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루터번역본은 헬라어 성경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렇게 문장의 순서가 바뀐 이유는 번역자...

11월2일 바리새인들의 침묵

  • 2006-11-02
  • 조회 수 1575

2006년 11월2일 바리새인들의 침묵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 3:4)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바리새인들(로 추정되는 이들)은 잠잠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칫하면 예수님을 고발하려든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전형적인 좌고우면입니다. 그들이 잠잠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그들의 양심을 찔렀을지도...

11월1일 옳음의 문제 (2)

  • 2006-11-01
  • 조회 수 1398

2006년 11월1일 옳음의 문제 (2)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 3:4) 어제 함께 나눈 루터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루터 앞에는 로마 교황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교황청과 맞짱을 뜰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국가도, 어떤 철학도, 어떤 이념도 없었습니다. 갈릴레오도 역시 자기의 소신을 표면적으로는 꺾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짐작...

10월31일 옳음의 문제 (1) [2]

  • 2006-10-31
  • 조회 수 1394

2006년 10월31일 옳음의 문제 (1)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 3:4) 예수님의 질문은 군중들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무엇이 옳은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문제가 늘 선과 악으로, 생명과 죽음으로 양분되는 건 아닙니다. 이 양자가 겹치기도 하고 그 경계가 모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늘 선택해야 합니다. 예컨대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후보자들을 완전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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