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일 성서의 관용어에 대해

조회 수 2894 추천 수 30 2007.03.02 08:05:56
2007년 3월2일 성서의 관용어에 대해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막 4:30)

마가복음 4장은 비유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농사에 연관된 개념인 씨, 뿌림, 자람, 결실, 추수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의 핵심은 변화, 또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막 4:30-32절에는 “겨자씨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체 이야기가 세 구절에 불과한데 그 서론이 한 구절을 차지합니다. 삼분의 일이 서론이라면 균형을 잃은 구도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30절은 그 당시 랍비들이 자주 사용하던 관용어라고 합니다. 청중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일종의 수사적 표현인 셈입니다.
성서는 성서만의 고유한 언어습관과 내용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주변의 것들을 그대로 따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바빌론과 이집트 문명의 설화들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고, 신약성서에는 헬라와 로마의 자연법적 도덕률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이런 것들을 세심하게 구별해서 경중을 좀 따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기독교적이지 않는 것들을 기독교적인 것과 똑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예컨대 갈 5:22,23절에 나오는 아홉까지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헬라철학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며, 롬 1:26,27절이 말하는 동성애에 대한 비판은 그 당시 로마의 일반 윤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독교적인 특성이 아니라고 해서 모든 걸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것들은 그것 자체로 강조될 수 없고, 기독교적인 특성의 하부구조로 자리해야만 합니다.

[레벨:0]잠잠히

2007.03.02 09:21:25

죄송한데요.
글쓰기에 있어서 논리적 비약이나 근거의 부재는 모두 문제잖아요.
"신약성서에는 헬라와 로마의 자연법적 도덕률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현재의 제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 의미는 아래 글에서 밝힐께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서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헬라철학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며"
나머지가 헬라철학 이전 구약 시대, 구약 성경에는 없던 것들인가요?
제 질문의 요지는 헬라철학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들이기에 기독교적 특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에요.
'열매들'이라고 하지 않고 '열매'라고 표현하여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사랑'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요.
고전13장의 사랑에 대한 설명과 연결하면 아주 분명한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헬라철학이나 그 이후의 불신자들이 말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동성애의 비판은 그 당시 로마의 일반 윤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글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로마의 일반 윤리이지 기독교적인 특성 곧 기독교적인 윤리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잘못 이해하였나요?
잘못 이해하지 않았다면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혹시 로마의 일반 윤리에는 포함되지 않은가요?
로마의 일반 윤리에 포함되어 있으면 그것은 기독교적 윤리는 아닌 것이 되나요?
기독교적 윤리와 일반 윤리가 외형적으로 일치하는 것들이 많지 않나요?
동성애와 관련하여 근거를 제시하면서 성경 시대의 윤리로는 그랬지만 지금은 바뀌었다고 말하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겠어요.
노예 제도가 성경 시대에는 가능했지만 이 시대에는 가능하지 않는 것과 같이요.
로마의 일반 윤리에 포함되기에 기독교적 윤리는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 허약한 논리라고 여겨져요.
마지막 내용에는 동의해요.
기독교적인 특성이냐 아니냐의 구분에 있어서 객관적인 근거만 정확하다고 한다면요.
위와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좀 정확하고 객관적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벨:1]짝지

2007.03.02 10:21:15

신약 신학자로서 바울을 전공한 백석대의 김정훈 교수는 성령의 열매와 관련하여 '사랑'이 성령의 열매들의 기초가 되는 총체적인 원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용섭 목사님의 글에 적용할 경우,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헬라철학적 요소들이 결국은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사랑에 의해 적용되어질 때 가능한 요소들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3.02 13:57:08

윤리나 도덕으로 말하자면 공자의 도덕이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주님이 최고 수준의 도덕적인 삶을 사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1절은 "예수 안에 있는 실재(진리)"대로라고 말하고 20절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리나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생명(zoe), 즉 실재(진리)이신 주님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3.02 13:57:37

잠잠히 님,
저의 글에 논리적 비약이 심했나보군요.
짧은 글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현상이기도하고,
제 사유가 그런 정도로 밖에는 활동하지 못하는군요.
여기서 모든 걸 해명할 수도 있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그저 방향만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성서에는 매우 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는 어떤 궁극적인 걸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지요.
그 손가락이 유대교적 전통이기도하고,
이교적인 전통을 조금 빌려온 것이기도 하지요.
종교학 박사인 이길용 목사가 언급해야 할 대목이겠지만
모든 종교는 약간의 혼합주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도 그런 요소들이 있다고 보아야지요.
그런 와중에서도 성서 안에는
독일어로 '로데 파덴'(붉은 실)이라고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떤 분,
초월적이기도 하고, 내지적이기도 한,
궁극적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할 그 분의 통치를 말하는 거지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정보들이 성서에 들어와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정보에 매달려 있다면 영적인 시각장애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울은 동성애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나타는 죄의 경향을 말하고 있어요.
물론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말하려는 것이만요.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동성애자들을 비난하지요?
내가 보기에 그건 성서의 왜곡입니다.
왜 그런지는 또 설명이 길어요.
천천히 진도나갑시다.
감사.

[레벨:1]균형

2007.03.02 17:16:17

정 교수님께서 다시 '동성애'를 언급하시네요.
이 문제는 그만 말씀하시면 좋으련만...

우선 동성애라는 문화적인 경향을 비평하는 것과
동성애자들을 정죄하는것이 다른 차원임은 구분되었으면 하네요.
문자주의 폐쇄성을 지적하는 예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신약의 배경이 로마의 식민지 통치였으며,
로마와 헬라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예로 언급하신 성령의 열매중에 하나인 '자비'를 대입해서 설명 한 다면
'자비'라는 본래 개념의 기원이 어디로 부터인가 라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공존을 위해 인간 스스로 터득한 깨달음인가
아니면 인간실존 본래에 심겨진 본성인가 이지요.

제가 예로 언급한 '자비'라는 개념은
로마와 헬라의 사조가 창안해낸 새로운 개념이라고만 규정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점에서 언급하신 성령의 열매의 기원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귀결시키시는 '잠잠히' 님은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칼빈은 이를 모든 인류에 보편적으로 심겨진 '종교의 씨'라고 설명합니다.
혹은 일반은총 이라고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 기록자가 로마와 헬라의 당시 사조로 부터 자유로울수 없었다는 지적으로
만족하기 보다는, 당시의 정황 마저도 활용하셔서 하나님의 의도를 전달 하셨다고 보는 것이
축자영감 혹은 완전영감의 입장 입니다.

당시 로마시대에 갖었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그 당시의 견해일 뿐이라 하고
그렇게 지나가기에는
동성애 경향의 문제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유가 되신다면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기대합니다.

[레벨:0]無名齋

2007.03.02 17:19:42

제가 보기에, 근본주의 내지 보수복음주의자들은, 동성애(자)를 비롯한 주변부와 소수자에 대하여 결코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균형님 말씀마따나, "동성애 경향의 문제가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보수근본주의자들은 너무나 가볍게 마음대로 재단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둔갑시켜버리지요. 저는 그것이야말로 반그리스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처럼, 문자만 볼 줄 알고, 뜻에는 눈감아버리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3.03 08:06:55

균형 님,
동성애 문제를 내가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이기 때문이지요.
동성애자들에게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 성찰해보면
거기서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주제에는 하나님 인식, 창조, 생명, 종말, 인간, 구원, 성화 등등의 많은 기독교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만약 이런 주제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면
책 한권을 써야 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앞으로 1억년 후의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은 여전히 이성애를 유지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때 쯤이면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가 없어질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허무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군요.
무엇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일까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너무 갈길이 멀군요.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지평에서 모든 걸 바라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의 실체를 완전하게는 모릅니다.
무엇이 성윤리의 규범인지, 무엇이 국가와 민족인지,
남자와 여자인지 잘 모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나요?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압니다.
지금 이성애는 부분적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지금은 이게 우리의 일반 윤리이지요.
그러나 종말론적 윤리는,
즉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이런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것은 메타-윤리라고 보아야겠지요.
그게 기대되지 않나요?
더 이상 동성애자들이 마이너리티로 왕따 당하지 않는 그런,
그런 메타 윤리의 세계,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로 가능한 그런 세계 말입니다.
저는 그게 너무 궁금합니다.
그것에만 저의 영적인 눈이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그걸 알고 싶어서 애를 태우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고, 신학공부를 하고,
세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요.
성령이 선취의 방식으로 활동하시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렇다면 지금은 아무런 기준도, 규범도 없는가, 하고 말하겠지요.
그럴리가 있나요.
생명을 세우는 게 규범이라면 규범이지요.
생명 파괴가 죄라면 죄이지요.
문제는 생명도 여전히 종말론적이라는 겁니다.
자꾸 말이 길어지네요.
결국 창조, 인간, 죄, 사죄, 하나님의 나라, 구원, 종말 등등,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요.
어느 하나만 뚝 떼어서 말하면 그건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동성애를 자꾸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라는 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 기독교역사,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앞으로 교회는 이성애자들과 동성애자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가 함께 예배드려야겠지요.
불교신자들과도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가, 하고 묻지는 마세요.
나는 혼합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칼빈의 말인 '종교의 씨'를 언급했네요.
그게 칼빈의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뉘앙스로만 본다면 개혁주의 신학개념은 아니군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는데, 어떻게 보편적인 가치가 남아 있다는 것인지요.
오히려 펠라기우스나 아퀴나스, 또는 알미니안 냄새(?)가 나네요.
자, 기다려봅시다.
그분이 자신을 완전히 드려낼 날이,
그분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날 날이 다가오고 있네요.
오늘 하루도 그만큼 가까워왔네요.
마라나타!

[레벨:0]잠잠히

2007.03.03 08:31:23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보고 놀란다고요.
정 목사님의 글에 대한 반대 의견 피력으로 혹시 언짢으신 것은 아니시죠?
겉으로는 자유로운 의견 피력을 말하든 분들 중에서 실제로는 언짢아하시는 것을 몇 번 경험하였기에요.
동성애와 관련하여 제가 배운 바를 올릴께요.
롬 1장이 죄의 경향성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그 죄의 경향성과 관련한 구체적인 항목도 동일한 비중을 가지고 있고요.
바울 사도는 동성애를 언급한 후에 동일한 비중의 합당치 못한 일을 언급해요.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그리고는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셨음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한다고 하면서 책망합니다.
여기에서 동성애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하겠네요. 아무리 읽어도.
동성애가 죄의 경향성만을 말하고 있지 금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본문 자체에서 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할 것 같아요.
아니면 제가 앞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계시역사나 인간 역사에서 바뀌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셔야 할 것 같고요.

[레벨:0]잠잠히

2007.03.03 08:31:44

동성애를 다루는 것과 동성애자를 대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요.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포용하고서 다시는 그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동성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동성애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간다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사랑은 동성 간의 사랑 곧 우정을 포함하면서 이성 간의 사랑도 포함하고 있고요.
이성 간의 사랑이란 결혼과 맞물려 있어요. 둘이 한 몸이 되는 사랑의 절정이 결혼이지요.
물론 자녀를 출산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고요.
동성애는 분명히 우정은 아니고 이성 간의 사랑과 동등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어요.
그렇지만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나 자녀 출산을 통한 가정 형성은 불가능하지요.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동성애도 해당이 되겠지요.
자신의 성향을 표출하고 그 성향을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인간다움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기에 동성애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져요.
예수님께서 간음 자체는 정죄하셨으면서도 간음한 여인은 품으셨던 것과 같이 교회가 동성애자를 품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성애 자체는 정죄하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3.03 08:43:47

잠잠히 님,
성서를 꼼꼼히 읽으시는군요.
저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근본을 향한 뜨거움과 열린 자세가 있기만 하다면
대화가 즐거운 거라고 봅니다.
좋은 말을 하셨네요.
위에서 열거한 죄의 결과들 말입니다.
불의 ....무자비....
그거에요.
동성애도 그런 유의 하나인 거지요.
죄의 근원으로부터 그런 죄의 결과들이 나오는 겁니다.
바울은 동성애를 그렇게 본 거지요.
그런데 보세요.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에게도 있지요?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가릴 것 없이
무두가 죄의 경향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어요.
죄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지요.
일단 그의 주장은 옳구요.
일반적인 관점에서요.
이제 우리는 그런 것에 근거해서
윤리의 문제를 구체화해야 합니다.
살인은 죄이지만 전쟁의 살인은 좀 다르겠고,
안락사도 좀 다르겠지요.
윤리는 상황의 구체성 안에서 정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동성애는 무조건
에이즈의 심판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교하거든요.
오늘은 이만이요.
설교 준비하러 가야겠네요.
잠잠히 님의 과의 논쟁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중심을 잡고 있으시니요.
좋은 주말, 주일....

[레벨:1]돌구름

2007.03.03 13:09:18

잠잠이님! 저의 경험에서 한 가지 사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20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입다만, 제 고등학교 동창 중에 특별히 여성성이 강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생물학적으로만 남성일뿐, 목소리며 행동거지며 생각하는 것까지 천상 여자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친구였답니다. 자칫 친구들의 놀림감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이 친구의 성격이 밝고 쾌활해서 큰 문제없이 학창시절을 잘 보냈지요.
저는 그 친구와 3년의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그 친구를 남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사실 거의 모든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여자를 보면, 아! 저 사람이 여자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저 자연스럽게 여성임을 느끼는 것처럼, 그 친구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그 친구와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부모님이 여자아이처럼 키웠다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랬다더군요. 어려서부터요.. 타고난 것입니다. 남성의 생식기를 달고 태어나 생물학적 남성이 되었지만 그 친구의 정신과 마음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번도 이 친구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제 짐작에 이 친구가 과연 이성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을까에 의문이 듭니다. 어쩌면 성전환수술을 했거나,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애인(남성)과 사귀고 있거나 할 개연성이 훨씬 크겠죠.
동성애문제 전반에 있어서 위의 얘기는 극히 부분적 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여성, 남성임에도 정신적인 면에서 동성애자일 수도 있습니다.
단지 몸의 쾌락만을 쫓는 이상성욕자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동성애를 몸의 차원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정신적 심리적 차원에서 더 깊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정신적,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동성애를 단죄하는 분들의 사고방식은, 동성애 = 변태섹스 = 비정상,죄악..이라는 공식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이러한 단순한 접근방식은, 동성애에 대해 보다 신중하고 깊이 있는 접근을 막게 됩니다. 그리고 함부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날선 단죄의 도구를 들이대게 됩니다.

[레벨:0]잠잠히

2007.03.03 20:52:48

제가 동성애가 죄로서 기독교 윤리에서 수용될 수 없다는 근거로
하나는 성경 본문이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이어요.
저는 본문 자체가 죄의 경향성과 함께 구체적인 항목이 제시되어 있으며 동성애도 포함된다고 밝혔어요.
이 부분은 좀 더 부연하고 싶어요.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불의한 자에 대하여 기술하지요(고전 6:9-11).
거기에는 로마서에서와 같이 동성애(남색)가 포함되어 있고요.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지체 중에 믿기 전에 그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말하면서 그렇게 기술하고 있어요.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면서요.
즉 바울 사도가 기록한 동성애를 포함한 불의를 행하는 자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저버리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성경 전체의 내용을 통하여서는 동성애가 수용될 수 있는 기독교 윤리로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보여요.
다른 하나는 인간다움에 대한 저의 이해이어요.
인간다움에 대한 저의 이해가 잘못된 것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정 목사님의 견해를 들려주세요.
윤리는 상황의 구체성 안에서 정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해요.
주일 이후에 글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을 적으시겠죠. 기대하며 기다릴께요.
음, 어떤 설교자들의 잘못된 설교 행태는 정 목사님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진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잘못된 행태를 기독교 윤리에서 동성애를 수용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논리적 비약일 뿐이겠지요.
설교 봉사를 통한 교회 세움에 복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래요. 좋은 주일 되세요.

[레벨:0]잠잠히

2007.03.03 21:13:54

윤리를 말할 때에 상황 윤리가 참 어렵다고 생각되어요.
동성애가 모두 돌구름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경우인 것은 아니지요.
돌구름님이 잘못된 생각이라시며 적으신 “동성애 = 변태섹스 = 비정상, 죄악”에 해당되는 경우도 있지요.
빈도수를 따지면서 빈도수에 의해 원리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고요.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경우만을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하면,
상황에 근거하여 원리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평행선일 가능성이 많다고 여겨지네요.
돌구름님도 “동성애 = 변태섹스 = 비정상, 죄악”의 경우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져요.
그렇다면 돌구름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경우에 대한 좀 더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과연 그러한가?
쟁토방에서 첫날처럼 님이 말씀하신 그런 경우에
그분들의 그러한 태도가 이성에게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이성에 대하여 현재 자기 옆에 있는 이를 대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얼마든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이성에게도 동일한 태도가 가능하며 똑같은 결과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의 그러한 태도가 동성에게만 가능하고 이성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만약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레벨:0]無名齋

2007.03.04 03:34:51

잠잠히님, 딴 건 그만 두고, 두 가지만 지적하지요.

1) 성서에, 남색을 금지했다시니,
그럼, 성서에 적히지 않은 '여성간의 동성애'는 됩니까?
(질문을 드린 겁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2) "쟁토방에서 첫날처럼 님이 말씀하신 그런 경우에
그분들의 그러한 태도가 이성에게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이성에 대하여 현재 자기 옆에 있는 이를 대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얼마든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이성에게도 동일한 태도가 가능하며 똑같은 결과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의 그러한 태도가 동성에게만 가능하고 이성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이성애라 하더라도,
폭력적, 억압과 착취의 구도, 상대를 대상화하여 자기 만족만을 탐하는,
그런 왜곡된 이성애는, 합법적인 부부 관계든, 연인이든,
'간음'으로 규정합니다.
(쟁토방의 제 글을 보셨다시피)

자, "동일한 태도, 똑같은 결과" 아닌가요?

"만약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 "무엇을 뜻"하느냐,
제가 판단하기로는,
사랑을, 즉 인간 및 인간 관계를,
이성애냐, 동성애냐라는 범주의 틀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부터가 부당하다는 뜻 같은데요?
이성애든, 동성애든,
나보다 상대를 낫게 여기는 헌신과 애정이라는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자는 겁니다.

잠잠히님이, 동성애 및 동성애 옹호자들에 대하여 불온하다는 선입견을 깔고 보셔서,
동성애 옹호론이 이성애에는 그만큼 공정한 시각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레벨:0]잠잠히

2007.03.04 18:41:05

성경이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을 다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요. 다 언급하여야 할 이유도 없고요.
성경의 문자를 해석하고 그 결과를 원리화하여서 그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하여야지요.
성경에서 남색을 언급하였다고 해서 "여성간의 동성애"는 되느냐는 질문 자체가 성경 이해에 있어서 잘못된 태도라고 보이네요.
남색이라고 했기에 남색만을 언급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자주의이겠지요.
그 단어에는 동일한 성격의 여성간의 동성애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문자주의를 반대한다고 금지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도 문자로 읽으면 안되지 않느냐고 반박하고 싶으신가요?
혹시 그렇다면 그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원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밝히시는 것으로 주장을 펼치시기를 바래요.
저는 그 본문이 언급된 모든 죄들 "음란,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 술취함, 후욕, 토색"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며 원리적으로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때에는 그러했는데, 시대가 흘러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네요.
혹시 그때보다 지금은 사람이 더 진화하여서 덜 진화한 그때의 수준에서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죄이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 본문이 단 한번의 범죄를 가리키지는 않고 반복적인, 생활이 된 모습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요.
무명재님의 간음에 대한 규정은 깊이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에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님이 언급하신 그런 경우를 성경은 간음이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네요.
간음은 성적인 사안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단어인 것 같아요. 정신적인 음욕, 육체적인 혼외정사.
저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는 동성간의 사랑을 부정하진 않고요.
이 주제와 연관된 사랑이라는 것은 이성 간에 이루어지는 인간 관계를 가리키지요.
부부됨을 추구하는 것이 허용되는 사랑 말이에요.
이성간에 부부됨을 추구하는 사랑과는 달리 동성간에 부부됨을 추구하는 사랑이 저는 옳지 않다는 것이지요.
제 이해로는 하나님께도 그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님이 말씀하는 선입견, 제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제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님처럼 생각하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에요. 사람에게 포용력이 있는 멋진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것 잘 알아요.
싫어서도 아니에요. 어차피 이 땅에 사는 존재는 인간인데, 서로 포용하며 용납하며 각자의 개성과 상황을 인정하며 함께 어우러져 불협화음 없이 살아만 가면 되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동성애와 동성애 옹호는 수용할 수가 없네요.
그들보다 제가 더 낫다거나 잘 산다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라는 생각에서요.

[레벨:20]신완식

2007.03.04 19:12:09

잠잠히 님~~~
혹시 동성애자들을 진지하게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한국에 있을 때는 외국인들을 별로 만나볼 기회가 적었는데
이 곳 런던에 와서 정말 수 많은 나라 출신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이젠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 다른 피부와 인종들의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도 보았고 한숨도......

제가 확신하기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 특히 전통적인 교리에 굳건히 서 계신 분들이
갖고 계시는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해는 상당부분 단편적이고 기계적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이래뵈도 한국과 영국에서 제일 보수적인 신학교 나왔거든요.
아예 <근본주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낀다는 신학교에서도 공부했었어요.

그런데 <기독교 교리> 그것도 <해석> 과정을 밟지 않은 교리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하면
하느님께 찬송하며 기도하면서 인디안들과 흑인들을 사람도 아닌 것처럼 백안시 하고 천시했던
과거 서구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걸어갔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도 있어요.
제가 훈련받은 그런 근본주의 신학교들은 사람보다 교리가 늘 우선순위더군요.

저도 한국에 있을 때는 성적소수자들 많이 정죄했어요. 물론 그들에 대해서 심판하는 설교도요 많이 했고요.

저는 경험론자는 아닌데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마음이 따뜻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영국인들이 10년 전에 죽은 다이아나 왕세자 비를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그녀는 AIDS 환자들의 손도 따뜻하게 잡아 주었고
먹지 못해 마른 막대기 같이 되어버린 아프리카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눈시울을 적셨어요.

제 아내는 본래 왼손잽이 인데 어릴 적 많이 놀림을 당했답니다.
"여자가~~~어떻게 왼손잽이야~~~"

이글 잠잠히 님께 설교하는 게 아니고요^^
잠잠히님 글 속에서 그냥 저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여서
그냥 한 번 써 봤습니다.
이러면 좀 더 친해 질 수 있을까하고^^

한 발 한 발 나갑시다.
소처럼 묵직히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아자! 아자!

[레벨:0]無名齋

2007.03.04 21:37:30

아.. 잠잠히님도, 성서는 해석이 필요한 문헌이라고 인정하시는군요.
(그런데, 해석을 하기 시작하면,
이보다 복잡하고 골치아픈 문제가 쌔고 쌨는데 어쩌죠?)
아니면,
'필요할 때엔' 해석할 수 있다,
그 '필요할 때'는 내 맘이다, 그런 건지요?

잠잠히님, 언제, 움베르토 에코 박사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어 보십시오.
정말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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