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조회 수 4436 추천 수 99 2006.03.26 23:13:33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제사장입니다. 왕과 제사장이 제도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선지자는 재야에서 이 제도권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왕, 제사장,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에서 이런 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선지자들이 왕정 가까이서 책사 역할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전반적인 흐름에서 볼 때 이런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보다 결정적인 요소는 선지자들의 활동 방식에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말’로 먹고 산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왕과 귀족을 향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민중을 향해서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 말들이 구약성서입니다. 구약성서의 중심을 차지하는 소위 예언서들이 그것입니다. 모세오경과 성문서를 제외한 모든 문서가 예언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전기 예언서와 선지자들의 설교를 담은 후기 예언서가 모두 선지자들의 말입니다. 모세오경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선지자들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문서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과 성문서의 내용에는 선지자들의 역사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서신학적인 문제들은 제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가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활동한 선지자들 중에는 우리가 구약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활동하다가 사라진 사람들도 꽤나 많습니다. 그들의 말이 역사에 남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요. 그들의 말이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거나 아니면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수준이 높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들의 말을 문서로 남겨줄만한 제자들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또는 괜찮은 글로 남기는 했지만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한 왕에 의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역사는 진행되어 지금 우리에게는 주로 후기 예언서라고 불리는 그런 문서가 주로 선지자들의 예언, 혹은 설교로 남아있습니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과 글을 야훼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했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겠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일들이 많았겠지요. 혹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방식의 말과 글쓰기가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들려준 말씀을 선포한다는 태도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역사를 읽고, 분석하고,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건 곧 해석한다는 말인데, 역사를 해석하는 행위에는 영감이 필요했습니다. 그 영감은 물론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은 곧 계시이며, 예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들의 말은 다시 역사적으로 비평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를 해석한 예언이 다시 역사적으로 비평받는다는 말은 이런 행위가 영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역사해석은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는 수학명제와 다FMS 것입니다. 역사해석은 오히려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해석의 층들이 거의 무한정으로 겹쳐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흉내만 내는 음악가가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흉내만 낸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니 구원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당시에 각광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지자들이 나름으로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매끄럽게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은 그때가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입니다. 비록 당시에 극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체는 역사에 의해서 엄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왜 이 따위야, 하고 핏대를 올릴 수도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우상숭배 하는 듯한 교회 앞에서 분노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사이비 선지자가 없던 때가 어느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혁명의 기운으로 잠시 무언가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혁명이 성공하면 그 혁명의 주체들은 아주 빠르게 무늬만 바뀐 거짓 예언자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status quo>(현실유지)가 우리의 대안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은 결국 역사에 의해서 평가된다는 사실을, 혹은 그런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역사의 흐름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그런 개혁과 변혁 운동에 역동적으로 참여해야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더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의 예언이, 우리의 설교가, 우리의 역사 해석이 결국 역사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예언도 결정적인 것이 못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역사해석도 역시 잠정적일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지, 혹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진리의 기준이 결코 우리 내부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는 역사를 끌어가는 진리의 영과 일치할 수 있도록 최선으로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를 참된 선지자로 평가하고 그렇게 선택했습니다. 그들의 평가와 선택을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따라가고 있습니다.

[레벨:18]눈꽃

2008.10.30 18:52:36

정목사님! Q,T 따라 가다보니 공부마니 하게되네요 "예를들러서 포퓰리즘..이게뭐꼬 사전찿아보랴 ..궁금증도 마니나니풀리고 ..,시작이겠지만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왜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하는지도....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밖에 다른길이 없습니다! 근데 너무나니 열어놓았다가 엉뚱한것이 들어오면 감당하기힘든사람은 안되는데....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하나님의 기쁨, 4월19일

  • 2006-04-19
  • 조회 수 2559

2006년 4월19일 하나님의 기쁨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1) 하늘로부터 울린 소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입니다. 첫 번째 소리는 우리가 어제 묵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번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통해서 마가복음 기자는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어느 정도 신앙의 연조가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서읽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성서 텍스트를 어떤 고...

사랑하는 아들, 4월18일

  • 2006-04-18
  • 조회 수 2286

2006년 4월18일 사랑하는 아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1) 하늘로부터 울린 그 소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더 정확히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핵심은 이미 마가가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아들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로 해석됩니다. ‘해석’이...

하늘로부터의 소리, 4월17일 [2]

  • 2006-04-17
  • 조회 수 2379

2006년 4월17일 하늘로부터의 소리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1)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보도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그 순간에 나타난 세 가지 현상에 관해서는 일치합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한다는 것, 하늘로부터 소리가 난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이 세 가지 현상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는 뜻일지 모르겠습니...

비둘기 같은 성령, 4월16일 [1]

  • 2006-04-16
  • 조회 수 3033

2006년 4월16일 비둘기 같은 성령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0)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나타난 두 번째 현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비둘기 같은 성령입니다. 마가는 왜 성령의 임재를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본다면 마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마 10:16) 근거...

갈라지는 하늘, 4월15일

  • 2006-04-15
  • 조회 수 2094

2006년 4월15일 갈라지는 하늘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0)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순간에 나타난 특별한 현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갈라진 것이며, 둘째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왔으며, 셋째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첫 번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 물속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순간에 하늘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도대체 하늘이 어떻게 갈라졌다는 것일까요? 하늘이 갈라질 수 있나요? 간혹 먹...

예수의 세례, 4월14일

  • 2006-04-15
  • 조회 수 2786

2006년 4월14일 예수의 세례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9)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약간씩 다른 뉘앙스로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보도합니다. 아마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태복음은 요한의 입을 통해서 그 상황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

갈릴리 나사렛, 4월13일 [1]

  • 2006-04-13
  • 조회 수 2481

2006년 4월13일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9) 갈릴리 나사렛 마가는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단강으로 왔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이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이라는 뜻이겠지요.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총칭하는 이름입니다. 중부 지역은 사마리아, 남부는 유대입니다. 유대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지역이고, 사마리아는 혈통적으로 순수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지역이며, 갈릴리는 비록 유대민족이라는 ...

성령세례, 4월12일

  • 2006-04-12
  • 조회 수 2249

2006년 4월12일, 성령세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은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여러 사도들과 대표 집사들이 세례를 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바울도 세례를 거의 베풀지 않았습니다. 아주 특이한 경우는 제외하구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어떻게 중요한 교회 예전으로 자리 잡았는지 우...

물세례, 4월11일

  • 2006-04-11
  • 조회 수 2407

2006년 4월11일, 물세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지금은 없어진 학습을 받았고 중학교 3학년을 마칠 즈음인 성탄절 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최소한의 나이만 차면 대충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전도사님만 계셨기 때문에 세례 받던 날은 다른 데서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성탄절이면 다른 교회도 바쁜 날인데, 어떻게 다른 교회 목사님이 오셨을까요? 내가 지금 세례 받은 날짜를, 혹은 그 절기를...

신발끈 (4월10일)

  • 2006-04-10
  • 조회 수 2176

2006년 4월10일, 신발끈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막 1:7)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낮출 때 사용하는 그 당시의 관습적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의 신발끈을 풀려면 본인은 일단 허리를 구푸리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신발에 두어야 합니다. 몸의 위치를 가장 낮은 곳에 두고, 시선을 아래로 깐다는 것은 극단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렇...

능력이란 무엇인가? (4월9일)

  • 2006-04-09
  • 조회 수 2251

2006년 4월9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막 1:7) 능력이란 무엇인가?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역사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언급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무력한지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즉 자기 능력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었습니다....

허리띠, 4월8일

  • 2006-04-08
  • 조회 수 2624

2006년 4월8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허리띠 세례 요한은 옷을 간소하게 입었습니다.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허리띠를 매는 옷을 입었습니다. 요한은 먹는 것도 생명에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대충 해결했습니다. 저는 요한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모습에 관한 본문을 읽으면서 구약의 한 장면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고센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전날 밤에 행했던 의식(儀式)입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피는 ...

메뚜기, 4월7일 [1]

  • 2006-04-07
  • 조회 수 2388

2006년 4월7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메뚜기 요한의 먹을거리는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은 세례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당시에 메뚜기는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먹을거리였는지 모릅니다. 간혹 아프리카나 중국, 또는 호주 같은 지역에 메뚜기 떼가 출몰해서 피해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만 고대에서 메뚜기는 서민들이 값싸게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였을 겁니다. 우리도 먹을거리가 궁했던 어...

낙타털 옷, 4월6일

  • 2006-04-06
  • 조회 수 3061

2006년 4월6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낙타털 옷 마가의 설명에 따르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고급 모피코트를 입은 멋쟁이군요. 동물애호가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 요한이 활동하고 있는 광야로 나가서 데모를 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누군지 아시죠?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과 이브에게 야훼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성서에 ...

요단강 (2) 4월5일 [3]

  • 2006-04-05
  • 조회 수 2584

2006년 4월5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2)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 아이의 경우에 할례와 정결의식만 행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이런 세례를 행했습니다. 요한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행하던 세례를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최초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

요단강 (1) 4월4일

  • 2006-04-04
  • 조회 수 2532

2006년 4월4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1) 4절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따르면 세례를 베푼 곳은 요단강입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서 남쪽의 사해에까지 흘러드는 물줄기를 요단강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요단강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사진을 통해서 대충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한강이나 낙동강같이 큰 강을 끼고 살...

회개의 세례, 4월3일 [1]

  • 2006-04-03
  • 조회 수 3384

2006년 4월3일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4) 회개의 세례 요한의 이름에는 대부분 ‘세례’가 따라다닙니다. 요한은 세례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에게 ‘그리스도’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처럼 사용된 현상과 비슷합니다. 요한에게 세례자라는 이름이 따라붙은 가장 기초적인 이유는 요한의 주요 활동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데에 있겠지요.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을 정도니까 그 당시에 요한의 세례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베풀어졌는지, 그리고 그가 베푼 세례의 권위가 얼마...

세례 요한, 4월2일 [1]

  • 2006-04-02
  • 조회 수 3283

2006년 4월2일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4) 세례 요한 공관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설명하기 전에 세례 요한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심지어 세례 요한의 출생설화를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연결시키기까지 합니다. 요한은 이미 가임기가 끝난 엘리사벳의 몸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는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여섯 달 간격으로 태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 뒤로도 요한과 예수...

주의 '길' 4월1일 [1]

  • 2006-04-01
  • 조회 수 3230

2006년 4월1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주의 ‘길’ 이사야가 말하는 주의 ‘길’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이 일어나야 할 장소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와 함께 광야에 뚫린 길을 통해서 오십니다. 이사야의 선포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그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이제 세례 요한의 사명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준...

광야 (3), 3월31일 [3]

  • 2006-03-31
  • 조회 수 3931

2006년 3월31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3) 광야는 별로 낭만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티브이도 없고 노래방도 없고, 테니스장도 없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즐길만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광야는 동창회를 열거나 계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것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곳입니다. 영적인 광야도 역시 재미난 곳은 결코 아닙니다. 그곳은 입담 좋은 부...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