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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9일 깨달음(2)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어제 깨달음의 문제를 한번 짚었는데,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오늘 부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단지 듣는 데 머물지 말고 깨우침의 단계로 나가야 한다는 말은 어떤 신비한 비술(秘術)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우침은 오히려 보편적인 해석학에 속합니다. 해석을 할 줄 안다는 것이 곧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해석할 줄 안다는 것은 말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구요. 그렇습니다. 말, 세계, 해석의 연관에서 참된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말의 세계가 있다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말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말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알아듣는 이유도 역시 말에 (무한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 노자가 이 말을 전해 듣는다면 금방 알아들었을 겁니다. 노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깨우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미 길, 진리, 생명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물론 노자가 예수님을 기독론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말의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세계는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종말까지 열려진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난 2천년동안 위대한 신학자들이 많은 신학적 담론을 쏟아냈지만 여전히 성서에서 말할 게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 세계를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아니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바리새인처럼 말씀의 정보에 묶여 있는 건 아닐는지요. 이런 방식으로는 평생 성서를 배워도 깨우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어제 깨달음의 문제를 한번 짚었는데,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오늘 부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단지 듣는 데 머물지 말고 깨우침의 단계로 나가야 한다는 말은 어떤 신비한 비술(秘術)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우침은 오히려 보편적인 해석학에 속합니다. 해석을 할 줄 안다는 것이 곧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해석할 줄 안다는 것은 말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구요. 그렇습니다. 말, 세계, 해석의 연관에서 참된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말의 세계가 있다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말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말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알아듣는 이유도 역시 말에 (무한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 노자가 이 말을 전해 듣는다면 금방 알아들었을 겁니다. 노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깨우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미 길, 진리, 생명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물론 노자가 예수님을 기독론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말의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세계는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종말까지 열려진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난 2천년동안 위대한 신학자들이 많은 신학적 담론을 쏟아냈지만 여전히 성서에서 말할 게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 세계를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아니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바리새인처럼 말씀의 정보에 묶여 있는 건 아닐는지요. 이런 방식으로는 평생 성서를 배워도 깨우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