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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9월28일 오병이어 (65) [7]

  • 2007-09-28
  • 조회 수 1852

2007년 9월28일 오병이어 (65)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막 6:43,44) 어떤 점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당을 건축하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불치병 환자가 치료되는 일도 따지고 보면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자연치유는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야 할 기적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일치’입니다. 세상에서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회사끼리의 경...

9월27일 오병이어 (64)

  • 2007-09-26
  • 조회 수 1576

2007년 9월27일 오병이어 (64)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막 6:43,44)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무엇인 참된 기적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 질서가 쉽게 허물어지는 기적보다는 그 자연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참된 기적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

9월26일 오병이어 (63)

  • 2007-09-25
  • 조회 수 1494

2007년 9월26일 오병이어 (6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막 6:43,44) 오병이어가 열두 바구니나 남았다고 합니다. 오병이어는 한 바구니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반 바구니나 될는지요. 그런데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원래보다 스무 배나 많이 남았다니,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킨 게 분명한 게 아니냐, 하고 주장하실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런 주장을 제가 무조건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

9월25일 오병이어 (62) [1]

  • 2007-09-24
  • 조회 수 1585

2007년 9월25일 오병이어 (62)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막 6:43,44)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고 합니다. 열두, 오천이라는 숫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성서기자가 이런 숫자를 제시하면서 이 사건을 보도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간접적으로 어떤 신앙적 의미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은 먹을거리가 열두 바구니이며, 먹은 사람의 숫자가 남자만 5천명이라는 4...

9월24일 오병이어 (61) [1]

  • 2007-09-23
  • 조회 수 1695

2007년 9월24일 오병이어 (61)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사람이 밥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모세의 말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어제의 설명을 오늘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안정감은 대개 밥에서 주어집니다. 이건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무도 밥을 먹지 않고 살아갈 사람은 없으니까요. 여기서 밥은 우리가 성취해내려는 모든 삶의 안전장치를 가리킵니다. 사회적인 지위, 건강, 가족 등등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밥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면 스스로 자족하게 되...

9월23일 오병이어 (60)

  • 2007-09-22
  • 조회 수 1435

2007년 9월23일 오병이어 (60)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주님의 대답을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의 독창적인 말씀이 아니라 신명기 8:3절의 인용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이후 40년에 이르는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마지막으로 행산 연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의 유언인 셈이지요. 신 8:3절에서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이유는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한 ...

9월22일 오병이어 (59)

  • 2007-09-21
  • 조회 수 1395

2007년 9월22일 오병이어 (59)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의 묵상에서 우리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요구를 짚었습니다. 그런 요구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의 메시아 상도 역시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그런 이데올로기가 메시아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기독교는 이런 세상의 메시아니즘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우리의 메시야니즘이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사탄의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

9월21일 오병이어 (58) [1]

  • 2007-09-20
  • 조회 수 1501

2007년 9월21일 오병이어 (58)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의 묵상에서 인용한 판넨베르크의 글에 예수님이 공생애 직전에 당하신 사탄의 유혹 사건이 나옵니다. 마가복음(1:12,13)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 간단히 전달하고 말지만 마태복음(4:1-11)과 누가복음(4:1-13)은 세 가지 유혹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중의 한 가지가 바로 오병이어와 연관된 빵과 생명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사십일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지내신 후에 사탄이 예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

9월20일 오병이어 (57) [1]

  • 2007-09-19
  • 조회 수 1415

2007년 9월20일 오병이어 (57)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아래는 판넨베르크의 설교 “생명의 밥”의 한 대목입니다. 1974년12월 뮌헨 마르쿠스 교회에서 드린 대학예배의 설교입니다. 생명의 밥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고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자로 축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탄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사실상 인간의 위기와...

9월19일 오병이어 (56) [4]

  • 2007-09-18
  • 조회 수 1300

2007년 9월19일 오병이어 (56)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밥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참된 생명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생명질서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의 생명질서와 전혀 다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달리 예수님이 그 죽음으로부터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는 경험입니다. 바로 이 부활 생명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이며, 첫 부활체가...

9월18일 오병이어 (55) [4]

  • 2007-09-17
  • 조회 수 1715

2007년 9월18일 오병이어 (55)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밥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면 이 밥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밥은 살아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그 밥이 우리의 생명을 영원하게 유지시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상의 혼령이 제삿밥을 먹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밥은 제한적인 생명인 셈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밥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데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9월17일 오병이어 (54)

  • 2007-09-16
  • 조회 수 1517

2007년 9월17일 오병이어 (54)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 묵상에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초기 기독교가 이해하고 믿었던 하늘에서 내려온 밥과 실제의 밥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의 밥은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만나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만나를 먹고 살다가 그들처럼 죽겠지요. 그렇다면 만나인 밥은 우리의 생명을 잠시 유지시킬 뿐입니다. 그런 밥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저는 지금 딜레마에 빠진 것 같습니다. 밥이 없으면 우...

9월16일 오병이어 (53)

  • 2007-09-15
  • 조회 수 1524

2007년 9월16일 오병이어 (53)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오병이어에 관한 해석인 요한복음 6:22-59절은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생명의 양식이라고 믿었습니다. 3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에게 오는 사람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말은 분명히 문자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고, 감기 몸살에 걸리면 괴롭습...

9월15일 오병이어 (52) [4]

  • 2007-09-14
  • 조회 수 1692

2007년 9월15일 오병이어 (52)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김지하 시인은 1984년에 이야기 모음집 <밥>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밥이라고 지칭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 내용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오병이어 사건을 일단 공관복음과 비슷한 구조로 전한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따라서 (재)해석합니다. 그 해석이 요 6:22-59절입니다. 이 본문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요한복음의 고유한 진술입니다. 이 대목에서 핵심은 35절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

9월14일 오병이어 (51) [3]

  • 2007-09-13
  • 조회 수 1449

2007년 9월14일 오병이어 (51)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오병이어로 남자만 계산해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결식아동들과 결식노인들도 상당한 숫자입니다. 북한을 비롯해서 총체적으로 가난한 나라로 눈을 돌리면 배고픈 사람들 천지입니다. 그들은 왜 배가 고플까요? 간단하게만 본다면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이겠지요. 일반적으로 가난은 본인의 책임으로 취급됩니다. 당사자의 게으름이나 무책...

9월13일 오병이어 (50) [4]

  • 2007-09-12
  • 조회 수 1751

2007년 9월13일 오병이어 (50)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기적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을 위해서 이 문제를 한 번 더 언급해야겠군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은 성서 밖의 세계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지금도 그런 소문들은 많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이런 현상들이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성모 마리아가 직접 현현했다는 이야기나 병자를 특별한 능력으로 고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신약성서에 들어오지 못한 외경이나 위경 중에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행한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9월12일 오병이어 (49) [4]

  • 2007-09-11
  • 조회 수 1593

2007년 9월12일 오병이어 (49)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당신은 오병이어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이 사건을 믿는지, 아니면 믿지 않는지 분명히 대답하라고 다그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말을 자꾸 빙빙 돌리는 걸 보니 믿지 않는 것 같다고 예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저는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전하고 있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다시 질문합니다. 그때 무슨 일...

9월11일 오병이어 (48) [11]

  • 2007-09-10
  • 조회 수 2084

2007년 9월11일 오병이어 (48)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지금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을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설명이 본문에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들이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대하든지 그것을 성서 전체와 연관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텍스트는 그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속한 마가복음 전체와 연결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복음서 및 신약성서 전체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게 아닙니다. 구약...

9월10일 오병이어 (47) [7]

  • 2007-09-09
  • 조회 수 1668

2007년 9월10일 오병이어 (47)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말씀 묵상의 한계를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제의 말씀을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저는 어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일절 침묵하고 있으며, 그런 기적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여기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의 선교역사를 거론할 분들이 있겠군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그런 초자연적 사건에 개입되었습니다...

9월9일 오병이어 (46) [1]

  • 2007-09-08
  • 조회 수 1479

2007년 9월9일 오병이어 (46)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 묵상에서 묻어두었던 두 질문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첫째,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결국 똑같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기적 행위자로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복음서의 중심은 아닙니다.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사건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단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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