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26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요한은 다시 천상의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할렐루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찬양의 이유이며 근거입니다. 그의 통치가 전능하다는 말은 세상의 어떤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지배받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입니다. 전능하신 이의 통치를 우리가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해결해주시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할만한 문장이 성경에 나오기는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병행구인 마 17:20절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편이니까 믿음만 있으면 모든 일이 잘되리라 생각합니다. 마치 조폭 두목의 막냇동생이 형을 믿고 동네에서 큰소리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사실을 안다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전혀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혼했다고 합시다. 걱정이 많겠지만 이혼이 그에게 오히려 유익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한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그것도 그들에게 선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만 하다면 자기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선하고 의롭기에 하나님만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분 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너무 관념적이라서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지금 당장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은 무조건 그런 환경이 좋아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은 희망과 현실을 이어주는, 그리고 불가시적인 것과 확신을 이어주는 삶의 태도입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큰 수술을 앞둔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수술 자체만 생각한다면 당장은 걱정이 태산이지만 의사와 의술을 믿는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믿음으로 손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쉽지 않겠으나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이 어려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쪽으로 매진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묻혔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을 미리 당겨서 산다
그 순간이 그 분과 가장 가까운 찰나일 것이기에...
종말론적인 세계관은
믿는다 자처하는 우리가 오늘 붙들고 살아야할
리얼리티이어야 함을 머리로는 동의하면서도
우리의 실존은 언제나 화급하고,
넋이 빠지게 할만큼 역동적이다보니
과연 이 긴장을 견지해간다는게 우리에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우리 어깨를 늘 짓누르는 실존의 무게와
그것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성경이 요구하는 긴장!
우리 실력으로 이 두가지의 병립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분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는
성경의 엄중한 요구를 너나 없이 알고 있으면서도,
우린 얼마든지 두마리 토끼를 잘도 몰아갈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와 함께
두마리 토끼몰이에 대해 서로에게 격려와 응원의 시선까지 보내주며 살아가겠죠?
정목사님이 그런 비유를 가끔 하시잖아요
막장 드라마 시청에 빠져 살면서 신학책 묵상을 겸해서 할수 없다고요
그런데 우린 거뜬히 잘해내고 있으니
그 출중한 처세술로 세상과 그 분을 용케도 겸하여 섬겨내며
흑도 아니요 백도 아닌 정체성으로
어줍잖은 인식의 동굴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평생 내가 만든 신을 믿고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군요
누가 그러더군요.
안믿는것 보다 무서운건 잘못 믿는 것이고
잘못 믿는 것보다 더 무서운건
자기가 잘못 믿고 있으면서 평생 의심 한번 않고 믿는 것이라고요.
우린 어디쯤에 있을까요?
"우리 모두의 미래는 ‘죽은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다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율법의 실천, 학문적인 업적, 정치적인 치적이 다 죽은 자가 됩니다. "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내가 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죽음의 순간이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든 나는 나로 연결되어 있다.
죽음의 순간에 그러니까 숨 쉬기를 멈추는 그 순간에 기억되어질 나로 지금 살아보면 어떨까?
어찌됐든 연결되어 있으니까 미리 그 때를 당겨서 살아 버리는 거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 순간이 숨을 쉬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찰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