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261)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마음에 달린 각주는 영혼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25절에 생명으로 번역된 프시케다. 똑같은 단어인 프시케를 25절에서는 생명으로, 26절에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다. 25절의 프시케를 생명이라고 했다면 27절의 프시케도 생명으로 번역하는 게 옳다. 27절을 생명으로 번역하면 어색하긴 하다. “지금 내 생명이 괴로우니 라는 말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괴롭다고 번역하면 프시케의 의미가 살지 못한다. 프시케는 인간 생명 현상의 하나인 마음보다 훨씬 깊은 차원을 가리킨다. 우리말에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면 일관성을 살려서 양쪽 모두 영혼으로 번역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자, 내 영혼이 괴로우니

예수가 내 영혼이 괴롭다.”라고 토로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지는 걸 보면 십자가에 처형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인성이 없는 신이라면 모를까 인성이 있다면 누구나 십자가 처형과 같은 끔찍한 죽음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나 예수를 그런 범주에서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정신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그런 공포심에 좌우되지 않는다. 걱정은 하겠으나 영혼이 괴롭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괴롭다고 토로할 정도로 예수를 영혼의 깊이에서 불안하게 한 문제는 그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했던 사람이 하나님이 없을지 모른다는 상황으로 몰렸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는 초기 기독교에서 이미 믿음의 대상으로 올림을 받은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적나라한 실체, 즉 예수의 인간성은 대체로 가려져 있다. 인간성을 송두리째 빼버리면 예수는 그야말로 공중에 뜬 존재가 된다. 이런 관점의 극대화가 가현설이다. 예수라는 인격체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이 혼합되지 않는 방식으로 연합하고 하나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기독교 그리스도론과 구원론, 더 나아가서 신론의 핵심이다. 그렇다. “내 영혼이 괴롭다.”라는 예수의 토로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를 더 가깝게 경험할 수 있다.


[레벨:23]브니엘남

2020.02.22 06:30:46

목사님 코로나 사태가 빨리 진정되어 교회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1. 31절에서 33절까지를 보면 '이때'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맞는 것 같습니다.

 

2. 영과 혼과 몸

(1) (spirit)-생명(zoe)

(2) (soul)-생명(psuche)-죄가 거하는 혼: 자아(self)

(3) (body)-생명(bios)- 죄가 거하는 몸: 육체(sarx)

성경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조에와 프시케가 완전히 분리되는 건 아니다. 이 관계는 몸을 가리키는 헬라어 소마와 육체를 가리키는 사르크스의 관계와 같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위와 같은 논거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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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20.02.22 20:21:09

예, 영과 혼과 몸이라는, 소위 삼분법은 일리가 있고 

성경에 나름의 근거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옳지 않습니다.

삼분법의 대표자가 '지방교회'의 창시자인 워치만 니(Watchman Nee)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ㅎㅎ

정통 신학은 영과 몸, 즉 이분법으로 봅니다.

영과 혼을 굳이 가를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이분법이니 삼분법이니 하는 것도 일시적인 가르침이지 결정된 건 아닙니다.

인간 생명이 어떻게 저런 범주에 갇히겠습니까.

어쨌든지 저는 아직 정통 신학의 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게 왜 옳은지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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