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1일- 가르침

조회 수 3333 추천 수 30 2006.05.31 23:25:30
2006년 5월31일 가르침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1)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는 말은 그가 랍비(선생) 역할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예수님은 문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런 주장의 개연성은 높습니다. 더구나 복음서도 예수님이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가 전달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별로 ‘먹물’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예수의 문맹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정확하게 찾아야만 그가 전하려는 복음의 핵심을 발견할 수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은 노동자, 하층민, 불한당 같은 사람들의 해방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들은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설령 ‘예수 세미나’ 학자들의 말처럼 예수에게 아무런 학문적인 배경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유대교의 학문이나 종교적 현학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그에게서 발생한 구원 사건을 인정하고 믿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학문성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신약성서 자체의 집필 의도나 관심이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데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정보의 차원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문맹을 근거로 하류층의 해방이 곧 복음의 실체라고 말하는 건 상당한 비약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는 복음서의 보도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단 예수님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랍비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회당이 열린 구조라고 하더라도 어중이떠중이 회당에서 가르칠 수는 없었겠지요.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호칭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이 그 당시의 서기관처럼 선생으로서의 라이선스가 있는 건 아니었겠지만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고 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선생으로서의 역할은 상당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든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모두 예수님의 고유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표징인 표적과 기적을 제외한 모든 행위가 가르치는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일반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가르침이 왜 중요할까요? 골치 아프게 가르치고 배울 게 아니라 그저 초능력만 보여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종교적 진리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기복적인 관심이 아니라 어떤 고유한 세계와의 만남, 또는 그 고유한 세계를 향한 돌입으로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는 자동차 운전이나 웅변기술처럼 기술적인 방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작(詩作)처럼 어떤 존재론적 깨우침으로만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몰려든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이러니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도 깨우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게 아니라 종교적인 자극에만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군요. 신앙적 가르침이 단지 기술의 차원에만 머물러 버린 오늘의 사태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 진정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원합니다. 아멘.

[레벨:8]김인범

2006.06.01 08:50:35

어느 때나 그러셨지만 생각을 많이 하게 하네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대면했음에도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
오늘의 내 자리는 과연 무엇일까를 묻게 됩니다.
이럴 땐 '아는 게 병'이란 말도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역시 알아야 하는 과정,
역시 은혜라는 결론이 아닐까요?
그 은혜를 구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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