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004) "와서 보라."(1)

조회 수 1701 추천 수 0 2018.12.07 20:58:17

예수&로고스 004- 1:39(1)

와서 보라!”(1)

 

 

원래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요한이 일부러 보낸 것인지 모른다. 자신의 역할과 예수의 역할을 이미 뚫어본 것 같다.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몇 번이나 나온다.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라는 예수의 질문을 받은 두 사람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가 현재 머물고 있는 숙소를 묻는 것으로 들리기는 한다. 39b절에는 그들이 예수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했다는 말이 나온다. 특이하게도 요한복음 기자는 그 시간이 열시쯤이라고 적었다. 열시는 요즘 시간으로 오후 4시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차원이 강한 복음서다. 예수가 머문 곳을 물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로 보는 게 좋다. 숙소를 찾는 일은 단순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며, 더 근본적으로 유랑 랍비였던 예수에게는 고정 숙소라는 게 없다. 이 중요한 대화 순간에 제자들이 숙소를 알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신은 어디 계시는가?’는 어떻게 해야 예수가 빛이며, 하나님의 영광이고, 세상 죄를 진 하나님의 어린양인지, 즉 당신이 말하는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 발언은 나중에 예수의 제자가 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다시 인용된다. ‘와서 보라.’ 진리를 깨닫는 것은 단순히 다른 이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 설명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말과 글자로 된 설명은 궁극적인 것을 전달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불교의 한 종파라 할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가르쳤다. 진리는 문자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언어(로고스)를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리가 있다.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우리에게 복음을 경험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보장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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