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일지 7월14일

조회 수 1412 추천 수 0 2019.07.15 21:39:40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714,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1) 죄 용서- 오늘(714) 설교 제목은 아들과 죄 용서’(1:3-14)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죄 용서를 협의로 이해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용서라고 말입니다. 잘못과 실수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다시 용서받습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고, 다시 죄를 짓고 용서받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영성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폭행, 거짓말, 분노 등등, 이런 부도덕하고 비인격적인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이전에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이유로 인간적인 책임을 피하면 곤란합니다. 영화 <밀양>이 이 문제를 다룹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 용서의 적극적인 의미는 죄로 인해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회복한 것입니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2) 생명 충만- 이번 설교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단락이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이 회복했다면 지금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재앙과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었는데도 그것이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게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가족 중에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데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의 기독교적인 답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하늘과 온 땅에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재앙과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도 하나님 통치와 영광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생명 충만! 그걸 알아채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걸 붙들지 못하는 건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좀더 치열하게 나의 삶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생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이런 길을 함께 갔으면 합니다.

 

3) 종강- 수요공부 종강 식사 모임이 지난 710일 오후 1230분에 교회 근처 고향칼국수 식당에서 열렸습니다. 2시부터 공부는 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빠진 분들도 계시고, 9명이 모였습니다. 각자 메뉴를 따로 선택했습니다. 저는 벼르고 벼르던 비빔 냉면을 시켰습니다. 칼국수를 시킨 분도 있고, 육개장을 시킨 분도 있습니다. 다른 메뉴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한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누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원래는 밥값은 각자 내기로 했는데, 수요공부 팀장인 은*희 집사가 혼자 다 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4) 서울샘터교회- 6월은 다섯 주가 있던 관계로 서울 샘터교회를 다섯 주일 만에 방문했습니다. 성찬예식을 겸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샘터교회에서 오전에 설교한 내용을 그곳에서 다시 한번 더 설교합니다. 어떤 목사들은 2, 3부 예배에서 하루에 서너 번씩 똑같은 설교를 하기도 하는데, 저는 똑같은 내용으로 설교하는 게 불편합니다. 오전에 들었던 분들이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을 기차에 두고 내렸습니다. 동대구 분실물 센터에 들어가서 신고하자 그 자리에서 확인이 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핸드폰 특징을 말하라고 하더군요. 투지 폴더폰으로 검은색이고, 번호는 1227이라고 알려드렸습니다. 내가 타고 온 열차 승무원에게 담당자가 연락을 취하자 5분 뒤에 찾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월요일 오후 영천역에 가서 찾으면 됩니다.

 

5) 부추 파전- 오늘 식사 반찬 메뉴에 부추 파전이 나왔습니다. 양념간장에 찍어 먹으니 고소하네요. 이 부추는 멀리 안동 근처 시골에서 나이 많이 드신 어른들이 농사지은 겁니다. *녀 권사가 시댁 어른을 찾아뵙고 얻어온 것으로 만든 부추 파전이라고 합니다. 우리 집 마당에도 작년에 심은 부추가 겨울을 나고 지금 잘 자라고 있습니다. 파전 한번 만들어봐야겠습니다.

 

6) 룸넘버13- 지난 주간일지에도 한 이야기인데, *진 집사 둘째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룸넘버 써틴연극을 오늘도 열 명 교우가 오후 3시 공연에 맞춰서 다녀왔습니다. 저의 집사람도 이번에 동행했습니다. 이미 주중에 다녀왔거나 다녀올 분들도 몇 분 계십니다. 저만 빼고 교우 대다수가 이번 연극을 관람하신 것으로 보이는군요. 집사람 하는 말이 두 시간 동안 주인공이 대사도 많고 액션도 많아서 끝나고 배우들과 함께 교우들이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주인공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는 겁니다. 관객도 꽉 찼다는군요. *혁 군, 수고 많았습니다. 당분간 땀을 더 많이 흘려야겠네요.

 

7) 성모- 식사 후에 장*아 집사가 초5년 아들 성모를 데리고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성모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걸 제가 몰랐습니다. 성모가 왔구나, 하고 말을 건네자 인사를 하네요. 장 집사가 하는 말이 앞으로 제가 계속 데리고 다닐까 합니다.’ 합니다. 성모가 차멀미한다고 혼자서 동네 교회에 다녔었지요. 성모 아빠는 대구 시내 모 교회 파트타임 부목사로 활동합니다. 한국교회에서 목사직은 전반적으로 비정규직입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목회를 소신껏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비정규직 문제를 나름 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교회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주일 아침에 세 식구가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이제 엄마와 아들은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성모의 차멀미 증상이 좋아졌나 봅니다. 힘내라.

 

8) 미얀마- *모 장로가 이번 주간에 미얀마 출장을 다녀옵니다. 출장 때마다 한두 주일을 빠지기에 이번에는 어떤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주일을 피해서 다녀온다고 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9) 예희- 1 여학생 예희라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예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주일에 아빠인 백*웅 목사와 함께 교회에 옵니다. 백 목사는 예장 통합 목사인데, 몇몇 교회에서 전임 전도사와 부교역자 활동을 했고, 지금은 잠시 쉬면서 아내와 함께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잠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기도 했고, 간혹 제가 자리를 비울 때 설교도 했습니다. 제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주곤 합니다. 예희 아래 자매와 엄마는 인근 교회에 나가는데, 이따금 엄마도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엄마 이름은 박*정입니다. 일전에 저와 통화할 때 아프신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주일에 제가 조문을 하러 갔어야 했는데, 서울 출타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장례가 다 끝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때 그 가족을 한번 만나서 위로해야겠습니다. 유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들으니 운영위원장이 교회를 대표로 조문을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애쓰셨습니다.

 

10) 예배 참석인원: 70, 헌금: 1,2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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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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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5월20일- “나를 따라오라!”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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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20일 “나를 따라오라!”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세속에서 이루고 싶었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오지로 떠난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위인들의 어록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말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명령문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

6월19일- 귀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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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19일 귀신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막 1:34) 예수님은 앞서 회당에서도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고, 이제 시몬의 집에서도 역시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복음서의 이런 보도 앞에서 지성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약간 당혹스럽습니다. 과연 이런 보도를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탈신화화(脫神話化)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으로 묘사된...

주간일지 11월22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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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20년 11월22일, 창조절 12주 1) 캐셔- 예배 후에 집에서 둘째 딸과 대화하는 중에 자신이 오늘 들었던 설교 내용 중에 내심 찔리는 대목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트 캐셔(계산원) 이야기입니다. 본인도 캐셔를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그냥 계산해 주는 기계처럼 대했다네요. 그래서 설교에 나온 것처럼 그가 서툴게 처리하면 짜증이 났다는 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인격체로 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유대계 철학자인 마틴 부버(M.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에서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

새해 달력 fil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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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일(수) 새해 달력 내 책상 왼편은 창문이다. 창문 옆에 새해 달력을 걸었다. 한독약품에서 나온 달력이다. 지난 주일에 대구샘터 교우 한분이 선물로 주신 거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내 눈길을 자주 끌게 될 달력이다. 1월 그림이 그 유명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그림 아래 설명을 보니 우피치 미술관 소관이다. 중간에 있는 여자가 비너스인가본데, 또는 이브인지도 모르겠으나, 표정이 야릇하다. 무심한 듯 어디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초점을 잃은 건지도 모른다. ...

7월25일 이백 데나리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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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25일 이백 데나리온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막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엉뚱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물러서지 않았다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반응이겠지요. 돈도 없는 우리가 이 백 데나리온(1천만 원 상당)어치의 빵을 사와야 되느냐, 하는 반론입니다. 제 삼자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아마 제자들의 손을 들어주었겠지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주님의 요청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는...

6월5일- 잠잠하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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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5일 잠잠하라.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5)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는 “잠잠하라.”이며 다른 하나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입니다. 이런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꾸짖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은 귀신의 실체를 인정하셨다는 말이 되는군요. 귀신의 실체 문제는 앞에서 잠간 다루기도 했고, 또 뒤에서 축귀, 치유,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다시 언급하게 될 테니까 여기서는 이만 접겠...

리베라 메, 도미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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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어느 모임에서 강연을 하다가 베르디의 ‘레퀴엠’에 관한 이야기를 했소. 그 곡 중에 ‘Libera me, Domine’라는 제목의 노래가 나오오. 그 뜻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요. 그 이외에도 영원한 안식, 진노의 날, 비통의 날, 세상은 먼지가 되리라 등의 제목이 나오오.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레퀴엠 내용으로 일련의 글을 써보고 싶소. 레퀴엠 해설로 여름 수련회를 열면 어떨지. 분위기가 너무 칙칙할지 모르겠구려. 생각해보겠소. 사람은 왜 마지막 순간에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거요? 일단 우리 운...

5월22일 “나를 따라오라!”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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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22일 “나를 따라오라!”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예수님은 왜 시몬 형제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본문은 그 대답을 정확하게 제시합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썩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고기를 낚는 것처럼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인다는 의미일 텐데, 번역자들이 그걸 우리말로 아름답게 표현할 길이 없었나 봅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적용된 용어...

10월25일 이혼증서(2)

  • 2008-10-24
  • 조회 수 4358

2008년 10월25일 이혼증서(2)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막 10:4) 모세는 왜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했을까요? 일단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문화가 만든 악한 질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이혼증서를 써 주고 여자를 쫓아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근거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이 많거나 질투 하는 것도 그런 근거였다고 하네요. 여자, 아이, 노예 등을 성인 남자에 비해서 어딘가 부족한 인간이라고 생...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 조회 수 4358

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진달래 옮겨심기 file [3]

  • 2015-04-09
  • 조회 수 4354

오늘 점심 먹고 앞산에 가서 진달래를 캐왔다. 이장에게 물었더니 뿌리까지 캐야 한다고 해서 마대 자루에 담아서 가져왔다. 우리집 앞마당에 심은 건 아니고 식당 식탁에 앉아 마주보이는 얕은 언덕에 심었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그곳에 진달래가 있었으면 했다. 심어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잘 보일까 모르겠다. 이미 진달래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캐서 가져오는 중에 꽃이 많이 졌다. 그래도 기운 잃은 꽃송이가 보이긴 한다. 저런 걸 세 그루 심었으니까 몇 년 지나면 어느 정도 모양이 날 거다. 아래...

<연민이 없다는 것> [6]

  • 2014-01-07
  • 조회 수 4353

1월7일(화) <연민이 없다는 것> 얼마 전에 모르는 분에게서 책을 한 권 받았다. 손으로 정성스레 쓴 편지와 함께. 가끔 이런 일들이 있어서 그렇고 그런 책인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예상 밖이었다. 대략 50 꼭지 정도 되는 산문들이 말 그대로 주옥과 같았다. 글에 품격이 묻어났다. 주제 또한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저자의 책읽기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독서로만 도달하기 어려운 삶에 대한 직관이 있었다. 아마 저자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한몫 했으리라. ...

5월11일 하나님의 나라 (8) [1]

  • 2006-05-11
  • 조회 수 4342

2006년 5월11일 하나님의 나라 (8)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우리에게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혹은 이 땅의 나라와 일단 구별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 밖에 없다면,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가 동일하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의미하니까요. 예.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 구별되며,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

예수님의 시험 (4), 4월28일 [7]

  • 2006-04-28
  • 조회 수 4315

2006년 4월28일 예수님의 시험 (4)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두 번째 시험은 다음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마 4:5,6) 만약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은혜와 진리, 요한복음 묵상(10) [3]

  • 2013-05-02
  • 조회 수 4294

1:14절에 예수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한다. 은혜와 진리는 보기에 따라서 궁합이 맞지 않는 결합이다. 은혜는 종교적인 개념인데 반해서 진리는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복음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진리다. 은혜는 진리로 나타나야 한다. 참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은혜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단순히 낱말 뜻인 ‘참된 이치’로만 알면 곤란하다.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

마르다와 마리아 [3]

  • 2016-07-18
  • 조회 수 4284

7월18일 마르다와 마리아 눅 10:38-42절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독립 전승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들어왔을 때 마르다는 부엌일에 충실했고 마리아는 말씀 듣는 일에 충실했다고 하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조금 자세하게 보자. 마태(26장)는 예수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향유를 식사하는 ...

예수와 천사들, 5월1일 [1]

  • 2006-05-01
  • 조회 수 4284

2006년 5월1일 예수와 천사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시험받는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을 돕는 천사들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짐승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이제 천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성서는 천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그것만...

한기총의 자중지란 [4]

  • 2011-03-03
  • 조회 수 4283

그대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기총의 추태에 관해서 소식을 들으셨소? 길자연 목사와 이광선 목사 사이에 벌어진 이전투구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지난 수년간에 걸쳐서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 천문학적인 돈이 뿌려졌다는 사실이 이들의 살벌한 물어뜯기 식의 싸움에서 밝혀졌소. 대표회장에 나서려면 20억이나 30억이 든다는 말도 나왔는데, 정말 믿기 힘든 일이오. 목사가 무슨 수로 그런 돈을 모을 수 있으며, 그 돈을 선거 운동에서 사용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소. 약간 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피선거권이 ...

옥중서간(5)- 비종교화(1)

  • 2010-05-08
  • 조회 수 4276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도대체 기독교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이런 질문을 이제 신학적인 말이건, 신앙적인 말이건 말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일반적으로 종교의 시대(die Zeit der Religion)도 지났다.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völlig religionslose Zeit)를 맞고 있다. 이제 자연적인 인간은 이미 단순히 종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종교적이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결코 그것을 실제의 행위에서 나타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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