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9일- 귀신

조회 수 4411 추천 수 42 2006.06.19 23:58:45
2006년 6월19일 귀신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막 1:34)

예수님은 앞서 회당에서도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고, 이제 시몬의 집에서도 역시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복음서의 이런 보도 앞에서 지성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약간 당혹스럽습니다. 과연 이런 보도를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탈신화화(脫神話化)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으로 묘사된 이런 보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신화 자체에 묶이지 말고 그 신화의 실존론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에서 실존만 건지고 만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 신앙이 살아 움직이는 이 역사의 리얼리티는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단군신화에도 실존론적 의미가 있으며, 동학혁명에도 실존론적 의미가 있는데, 굳이 그리스도교를 고집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요. 우리는 인간 실존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적 현실을, 굳이 그쪽의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실존을 성서 텍스트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귀신을 내쫓았다는 이 보도에서 일단 ‘귀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따라가 봅시다. 헬라어 성서는 32,34절에 나오는 귀신을 영어 demon에 해당되는 ‘다이몬’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23절의 귀신은 영어 spirit에 해당되는 ‘프뉴마’를 사용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이 귀신이라는 뜻이지요. 참고적으로 루터 번역을 찾아보았습니다. 루터는 34절의 많은 귀신을 “viele böse Geister”라고 번역했고, 23절의 더러운 귀신을 “ein unsauberen Geis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 번역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각각 “많은 나쁜 영들”, “한 더러운 영”입니다. 헬라어 성서는 다이몬과 프뉴마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한 반면에 루터 성서는 ‘가이스트’만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독일어 가이스트가 그만큼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만큼 단조롭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일까요?
독일어 Geist는 ‘영’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정신’으로도 번역됩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Phänomenologie des Geistes>라고 합니다. 성령은 “der Heilige Geist”이지요. 참고적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phenomenology of mind>라고 영역되었는데, 독일어 Geist를 mind로 번역되는 건 바르지 않다고 합니다.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에서 폴 틸리히는 독일어 가이스트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대문자 Spirit으로 한다고 설명하더군요.
다른 이야기가 너무 많았군요. 위의 언어 문제를 전제하고 볼 때 우리는 귀신을 ‘악한 정신’으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정신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 나타나는 차원이 아니라 최고의 영적인 능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헤겔에게서 하나님은 곧 ‘절대정신’이거든요. 이에 반해서 인간은 상대적인 정신이겠지요. 양쪽 모두 정신이라는 사실은 일단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성서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 바른 정신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여기서 바른 정신은 단순히 순수이성, 또는 실천이성이라기보다는 궁극적인 생명의 리얼리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인식하고 신뢰하는 우리의 영적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귀신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물론 귀신이 실체와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런 좁은 의미로만 보는 건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훨씬 심층적인 의미에서 귀신은 더러운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 앞에서 그런 세력은 무능해집니다.

주님, 바른 정신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레벨:1]똑소리

2006.06.20 15:15:39

그 동안 교회에서 귀신은 어떤 인격체로 배웠는데 목사님은 귀신을 악한 정신으로 해석하셨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악한 정신은 누구의 정신일까요?
순수한 인간의 왜곡된 정신일까요? 아니면 외부에서 침투한 다른 정신일까요?
그게 궁금해 지는군요.
만일 성서의 귀신을 인간과 구별되는 어떤 인격체로 보지 않고
순수 인간의 "타락한 정신" 또는 "왜곡된 정신" 정도로 설명한다면
맨정신으로도 알 수 없는 예수의 정체를 더러운 정신으로 알았다는 건 이성적으로 납득이 잘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귀신의 실체를 인간정신과 구별되는 어떤 인격체라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신현상에서는 정신이 타락하면 통찰력이나 분별력이 흐려진다고하던데요.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정신이 어느 순간에 왜곡되고 타락할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구요.
다만 저로서 성서에서 그런 걸 귀신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에 대해서 의심이 좀 가는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6.20 23:50:52

성서가 귀신을 독립된 실체처럼 묘사한 것은
그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지요.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그런 걸 잘 모릅니다.
사실 인간 자체도 잘 몰라요.
영과 육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몰라요.
여전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여러 방식으로 논의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인간 이해는 정확합니다.
피조물, 영적인 존재, 죽어야 할 존재 등등,
그리고 영과 육의 결합체라는 성서의 진술을 옳습니다.
그러나 그런 진술은 여전히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위에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을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도 역시 성서 기자의 해석입니다.
그런 해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우리가 다시 해석해야겠지요.
그리스도교는 악의 세력을 뚜렷이 보고 있지만
그걸 실체로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인간 삶의 현상에 나타나는 그것을
나름으로 해석한 것이에요.
그런 해석아 옳으니까 우리는 그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역시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인간 삶에 불행이 계속되는건가, 하는 질문은 아주 복잡하지요.
귀신이 독립된 인격체일까요?
나는 그렇게 보기 힘드네요.


이길용

2006.06.21 00:30:48

실체와 실재는 차이가 있겠죠. 만약 귀신이 독립된 인격체라면 베드로보고 사탄이라 했을 때.. 베드로는 그 순간 귀신, 혹은 사탄이라는 인격으로 변환된 것일까요? 흔히 성서에서 언급되는 귀신이라는 것은 영, 즉 정신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라고 봐야 합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원귀개념과는 좀 다르다고 봐야겠죠. 동아시아의 원귀개념은 실체적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전이 이기의 조합으로서 사물계를 인식하는 구조 속에서 귀신도 역시 분명한 인격적 실체 개념을 지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성서에서 언급되는 귀신이란 그런 인격적 독립체라기 보다는 일종의 세력으로 봐야 할 겁니다.

세력이란 실재(real)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독립된 실체라고 보기는 힘들겠죠. 예를 들어 내 안에 나를 미혹케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을 훼방하는 그 세력은 분명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독립된 실체로서 순진무구한 나에게 명령한다고는 보기 힘들겠죠. 그렇게 본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귀신, 혹은 악한 영이란 하느님의 지배와 통치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영적인 세력들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부분을 묘사할 때 성서의 기자들은 마치 귀신이 독립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게 표현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제한 속에서 나타나는 표현들이라 보고 싶네요.

여하튼 저는 귀신을 하느님의 통치와 그분의 뜻의 실현을 방해, 혹은 그것에 저항하는 실재적인 세력들이라 해석하고 싶습니다.

동아시아의 원귀로서의 귀신개념은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었음 좋겠네요.



[레벨:1]똑소리

2006.06.22 17:34:22

"만약 귀신이 독립된 인격체라면 베드로보고 사탄이라 했을 때..
베드로는 그 순간 귀신, 혹은 사탄이라는 인격으로 변환된 것일까요"라고 반문하셨군요.
위의 사건에 해당하는 본문을 읽고 베드로를 사탄으로 이해할 그리스도인이
과연 몇 명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복음서도 그렇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과 귀신을 대상으로서 구분지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사탄이 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해 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성서의 귀신은 인격적 독립체라기 보다는 일종의 세력으로 봐야 할 거라고 언급하셨죠?
그러면 " 독립된 인격체"는 "일종의 세력"으로 활동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겠군요.
그런점에서 인격체와 세력을 구분하는 기준은 어떤건지
또 세력은 인격체로, 인격체는 세력으로 활동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고요.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군요.
"세력이란 실재(real)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독립된 실체라고 보기는 힘들겠죠. 예를 들어 내 안에 나를 미혹케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을 훼방하는 그 세력은 분명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독립된 실체로서 순진무구한 나에게 명령한다고는 보기 힘들겠죠. 그렇게 본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귀신, 혹은 악한 영이란 하느님의 지배와 통치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영적인 세력들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내 안에 나를 미혹케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을 훼방하는 그 세력은 분명 실재합니다"
는 주장에는 제 생각도 같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부분을 자주 발견하지만
그런 속성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으니까요.
그런데 " 성서에서 말하는 귀신, 혹은 악한 영이란 하느님의 지배와 통치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영적인 세력들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는 주장 가운데 그 <영적 세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건지 설명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군요. 그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지, 사람의 정신인지, 영인지,
영이라면 사람의 영인지 인간의 영과 구별되는 다른 악한 영인지 말입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우리 안에는 분명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분별할 수 없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그 "악한 세력"을 두고 "귀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실체야말로 바로 인간 자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특정상황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실패할때마다 그 인간이 귀신이 된다는 논리도 성립되겠군요.
과연 성서 기자들이 자기욕망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한 속성을" 귀신"으로 인식했을까요? 그런걸 귀신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루에 수도없이 귀신이 되지 않을까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의 명령에 의해서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떠났다면 그 사람이 후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파악하면서 성자처럼 살았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무능한 인간의 허약성을 귀신으로 규정하고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반생태적, 반인권, 반평화, 반생명적인 삶을 성찰한다면, 큐티생활이나 영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은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귀신이해가 과연 성서신학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악마"와 "악마적"인 것은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반생명,반인권,반평화적인 흐름은 악마적일 따름이지 악마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성서의 귀신을 "정신"이나 어떤 모호한 "세력"으로 이해하면
좀 고상하고 학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김기동의 귀신론과 하등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력이 어디 한 두번으로 그칩니까?
인간 안에 내재한 그런 속성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것을 모조리 귀신으로 규정한다면 도리어 그게 변형된 김기동 귀신론 아닐까요?
우리는 하루에 수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정목사님께서 서두에 밝힌대로
우리는 여전히 귀신의 실체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하는게 가장 옳은 태도인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길용 목사님께서 제게 귀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꺼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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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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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절에 예수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한다. 은혜와 진리는 보기에 따라서 궁합이 맞지 않는 결합이다. 은혜는 종교적인 개념인데 반해서 진리는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복음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진리다. 은혜는 진리로 나타나야 한다. 참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은혜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단순히 낱말 뜻인 ‘참된 이치’로만 알면 곤란하다.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

예수와 천사들, 5월1일 [1]

  • 2006-05-01
  • 조회 수 4292

2006년 5월1일 예수와 천사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시험받는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을 돕는 천사들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짐승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이제 천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성서는 천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그것만...

한기총의 자중지란 [4]

  • 2011-03-03
  • 조회 수 4289

그대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기총의 추태에 관해서 소식을 들으셨소? 길자연 목사와 이광선 목사 사이에 벌어진 이전투구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지난 수년간에 걸쳐서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 천문학적인 돈이 뿌려졌다는 사실이 이들의 살벌한 물어뜯기 식의 싸움에서 밝혀졌소. 대표회장에 나서려면 20억이나 30억이 든다는 말도 나왔는데, 정말 믿기 힘든 일이오. 목사가 무슨 수로 그런 돈을 모을 수 있으며, 그 돈을 선거 운동에서 사용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소. 약간 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피선거권이 ...

마르다와 마리아 [3]

  • 2016-07-18
  • 조회 수 4286

7월18일 마르다와 마리아 눅 10:38-42절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독립 전승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들어왔을 때 마르다는 부엌일에 충실했고 마리아는 말씀 듣는 일에 충실했다고 하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조금 자세하게 보자. 마태(26장)는 예수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향유를 식사하는 ...

옥중서간(5)- 비종교화(1)

  • 2010-05-08
  • 조회 수 4277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도대체 기독교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이런 질문을 이제 신학적인 말이건, 신앙적인 말이건 말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일반적으로 종교의 시대(die Zeit der Religion)도 지났다.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völlig religionslose Zeit)를 맞고 있다. 이제 자연적인 인간은 이미 단순히 종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종교적이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결코 그것을 실제의 행위에서 나타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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