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2), 3월24일

조회 수 9615 추천 수 112 2006.03.24 23:14:03
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말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엑서더스,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이집트와 바벨론은 제국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국의 속성인 제국주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리의 준거를 자신에게만 한정함으로써 패권을 행사하는 힘이 곧 제국주의인데, 이집트와 바벨론은 전형적인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는 바로 신(神)이었습니다. 약간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제국과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강력한 힘으로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는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을까요?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나 할까요? 거꾸로 기독교 스스로 제국주의적 패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자기를 확장해야하겠다는 욕망이 내용적인 면에서 제국주의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보면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는 자기가 극복해야 할 그 악한 힘을 자기 내부에 키우고 있는 셈이겠지요.
둘째, 출애굽과 포로귀환은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출애굽을 보도하고 있는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는 제국을 하나님이 무력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야훼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게 곧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 구원 사건이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이 주로 정치, 사회적인 사건과 연결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칫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곧 정치적 해방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서읽기의 방향 착오입니다. 복음이 정치적으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정치적 해방이 곧 복음은 아닙니다.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보도하는 구약성서의 중심도 역시 그 정치적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있습니다. 엄중한 국제질서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신약성서는 복음을 전혀 새로운 지평에서 접근합니다. 신약의 정치적 배경도 역시 로마라는 제국이지만 신약의 복음은 더 이상 정치적 해방보다는 어떤 한 인격체와의 일치를 통한 궁극적인 해방을 선포합니다. 아마 신약성서는 구약이 그렇게 천착했던 정치적 해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정치적 해방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정치의 최종 목표인 복지의 극대화를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한 사건, 한 운명에서 복음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 복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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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4.16 09:34:33

록키 실베스터스텔론의 "데몰리션맨' 에 극대화된 복지사회가 나옵니다

[레벨:18]눈꽃

2008.10.30 18:00:30

오늘의 묵상! 많은것을 생각하게합니다 "끝없이 자기를 확장해야하겠다는 욕망이 내용적인면에 제국주의이니까요....복음을 전해야할 교회는....내부에키우고 있는 셈이겠지요 "에서 교회에다가 에 저를 대입해봅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한 사건,한운명에서 복음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 복음의실체를 진정하게 생각해보았나요? 진지하게 생각해보란 말씀이지요? 해보다가 말다가 그냥 세월만보냈습니다 ..감사!

[레벨:18]은나라

2016.06.29 21:54:37

신약성서 공동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한 복음의 실체가 부활일텐데요..

문자 그대로의 부활이 아닌 전혀 다른 그 경험이 무언지? 그들의 경험과 지금 우리가 신앙을 통해 하는 경험과 같은지? 아님 다른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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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06.29 22:50:06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적 생명이

역사에 유일회적으로 선취된 사건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무엇인지는

종말에 가서 다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서

예수 부활을 변증해야겠지요.

그게 신학이고 신앙이고 교회생활입니다.

완전하게 실증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니

인내하고 믿고 희망하며 기다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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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6 21:20 다섯째는 홍바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다섯째부터 열두째까지 당시의 모든 보석이 열거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석들이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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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6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로 묘사하려고 온갖 묵시적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이미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해서 읽다 보면 하나님을 옥황상제나 임금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보좌도 임금이 앉는 최고급 의자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성경 문장은 메타포(은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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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20 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 요한이 묵시적 심판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24절에 나옵니다. 이 말을 하려고 앞에서 동어반복으로 들릴 정도로 길게 심판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죽임을 당한 모든 자가 로마에서 피를 흘렸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것입니다. 실제로 목숨을 잃거나 박해를 피해서 고향을 등지거나 일자리를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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