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성품

조회 수 2170 추천 수 0 2015.05.25 22: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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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품

 

신앙과 성품은 어느 정도 비례할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성품도 좋은가? 성품이 좋아야 신앙도 좋은가? 신앙이 별로면 성품도 별로인가? 성품이 별로이면 신앙도 어쩔 수 없는가? 각 경우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신앙과 성품은 정비례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앙과 성품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일까? 기독교인은 당연히 신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교과서 식의 정답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성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사람이면 좋을지를 생각하면 대답이 나온다. 신앙은 좋은데, 또는 열심인데, 성품이 이상한 사람과 사는 경우, 그리고 신앙은 없거나 별로인데 성품이 괜찮은 사람과 사는 경우에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보면 대답이 나올 것이다. 신앙도 좋고 성품이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둘 줄의 하나를 고르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신앙에 의해서 성품이 바뀔까? 신앙이 깊어지면 거친 성품이 부드러운 성품으로 바뀔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특별한 경우를 접어놓고 본다면 신앙에 의해서 성품이 변하기는 어렵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 다녀도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도 역시 그렇고, 변덕이 심한 사람도 여전하다.

어느 단체나 마찬가지지만 교회에도 다양한 성품, 또는 성격의 사람들이 모인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두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만 모인다고 해서 무조건 건강한 교회는 아니다. 개중에는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있어도 된다. 그런 성품을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서로 다른 성품들이 어울려서, 비록 중간에 삐꺼덕 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귀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레벨:23]브니엘남

2015.05.26 07:08:25

주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요일 5:11-12)과 본성(벧후 1:4)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당연히 성품이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저희에게 말하되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어떻게 지냈는지 너희도 아는 바니”(행 20:18)라고 말하고, “이는 우리의 복음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너희에게 이른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는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라고 말한다. 바울이 그들에게 상기시켰던 것은 그의 사람 됨됨이, 즉 그의 조성과 그들 가운데서 살았던 그의 삶이었습니다. 이는 사람 됨됨이, 즉 조성이 바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람 됨됨이, 우리의 어떠함이 곧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성품은 비례되어야 합니다. 이때 성품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난 후의 주님으로 조성되어 변화된 성품을 이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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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5.05.26 10:45:46

브니엘남 님의 생각이

원칙적으로 옳습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이해가

따라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품은 타고난 부분도 있고,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도 있는데,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거지요.

혹시 기독교 뉴스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박윤선 목사님의 따님이 쓴 <목사의 딸>이라는 책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답니다.

한국교회가 대부처럼 떠받들고 있는 박윤선 목사님이

가정에서는 폭력적으로 행동하셨다는군요.

그분의 시대에 학습된 가부장주의적 폭력을

예수 믿어도 바꾸지 못한 거지요.

이해가 갑니다.

그분이 이상한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런 거지요.

칼빈도 어떤 점에서는 폭력적이었어요.

품성에 습관까지 포함되는 거라면

예수 믿어도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옳습니다.

저의 경우에 테니스를 칠 때 승부욕이 너무 큽니다.

목사가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가능하면 기쁨조 노릇을 하면 좋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그래서 오히려 동호회원들이 저와 게임하는 걸 좋아하지만요. ㅎㅎ

성품, 성격, 습관, 세계관 등은

타고나기도 하고

또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학습되기도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흑인 노예를 동물 취급한 사람들이

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었잖아요.

저를 보더라도 무늬만 달라지지

실제로는 달라지는 게 별로 없어서

'신자들은 변하지 않으니,

그리고 구원은 은혜이지 자기 의가 아니니,

변화되어야 한다고 닥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자주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비관하지 말고,

동시에 그것을 합리화하지도 말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도록'(벧후 1:4)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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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5.05.26 11:32:14

나이가 거진 오십이 되고, 

모태신앙이니 신앙연수도 오십이 되니

나름 통계치를 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성품은 비례하지않다는 결론이어요.

그건 착각이고 바램일 뿐입니다.

그 착각을 대외적으로도 말하다보니

기독교인에 대한 겉보기 등급이 높아지고

실재 등급과의 심한 괴리가 생기고

그래서 더 많은 지탄을 받고

이것의 악순환입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자격이 되어서도 아니고

성화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목사님, 자체적인 통계결과가 슬픕니다.

저도 그렇거든요. 그래서 좌절합니다만.

세상의 물에서 맑은 물을 떠온 것이 교회가 아니라

랜덤으로 퍼온 것이 교회의 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성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품은 별로 변하지 않아요.

그러나 신앙이야 말로 장래를 장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왜 이것을 이분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으나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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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5.05.26 13:53:59

아니 누가 거진 오십이라는 건가요.

내가 알고 있기로는

유니스 님이 사십대 초반인데요.

골라서 데려온 게 아니라

무작위로 데려왔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고,

예수님의 비유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네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들어 왕의 잔치에 초청했다는 비유말입니다.

예복이 없는 경우가 문제인데,

사는 것도 그렇고 신앙도 간단하지 않네요.

어쨌든지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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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얼냉

2015.05.26 20:46:58

조금 위안을 받게 되는 글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중직을 맡아야 하기에... 

그냥 천성이라고 전혀 무책임 할 수 가 없게 됩니다. 

특별히,... 가족이 싫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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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5.05.27 14:56:44

고칠 거는 고치면서 사는 게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거겠지요.

형제 자매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하는

주님의 말씀도 있으니까요.

[레벨:9]흔들린는풀잎

2015.05.27 00:37:23

서로 다른 성품들이 모여서 귀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한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좋은 성품이 있고 나쁜 성품이 있을까요?

서로 다른 성품일 뿐인 것은 아닐런지요...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앙적으로 바르고 선한 것일까요?

그 사람이 아무리 부드러운들 사회의 구조악 가운데 있다면 그 부드러움은 구조악에 눈감고 좋은게 좋은 거라고 여기며 회피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 부드러움은 상처나고 거칠어진 마음의 담들을 둥글게 어루만지기도 하겠지요...

반대로... 거친 성품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앙적으로 약하고 악한 것일까요?

거친 세상살이에 지쳐 힘이 없고 나약해져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긁히고 찔려 피가 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길을 열어 다른 이들이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한다면... 물론... 때로 말로 행실로 의도치 않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요...

 

좋은 성품은 없지 않을까요? 다른 성품이 있을 뿐...

물론 삶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타인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말입니다...

 

베드로도 성격이 급하고 거친 사람으로 묘사가 되었지요... 루터도 원래 과감하고 거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거칠면 거친대로 과한 부분과 약한 부분이 있고, 부드러우면 부드러운대로 약함과 좋은 부분이 있고...

남자는 상대적으로 여자에 비해 거칠고... 여자는 상대적으로 남자에 비해 부드럽고...

인간은 이런 거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의 남녀가 균형을 이루며 인간의 역사를 이루어온게 아닐런지요...

인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이런 생명의 원리로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차가운 물이 만나 생명의 에너지를 끝없이 만들어내듯이 말입니다...

어느 쪽이 선하고 어느 쪽이 악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거칠고 적극적인 힘이 선할 때도 있고...

부드럽고 소극적인 힘이 선할 때도 있고...

 

그렇다면...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신앙이었으면 가장 적절한 기준이 되지 않을지...

신앙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창조와 구원... 그리고 생명... 그 정도를 생각한다면...

때로 부드러움이... 때로 거친 힘이...

 

물론... 인간은 한번 성품이 형성되어 굳어지면... 거의 죽을 때까지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굳어진 성품이 어떤 방향성... 신앙에 의해... 그럭저럭 부대끼며 나아갈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겠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목사님의 결론처럼...

서로 다른 성품들이 모여서 귀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이 말은 부드러운 성품과 거칠은 성품들이 서로 다른 용도의 재료가 되어서...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가...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저는 저의 성품이 좋으면서도 굉장히 불만도 많습니다...

저와는 반대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되기도 하면서 그 이면의 아름다움도 보입니다...

안좋은 것이 아닌 다르기 때문에... 그 또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사자도 아름답고... 나비도 아름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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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5.05.27 15:04:36

백성웅 님의 말대로

성품 자체만 놓고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요.

부드럽다거나 거친 거만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삶의 태도까지 포함해서 성품을 말한 거지요.

갈 5장에 나오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속한 항목들도

다 포함해서 성품을 말해야겠지요.

한편에서는 시기, 분냄, 분열, 투기 등등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화평, 자비, 온유 등이 나오는군요.

그걸 그렇고

대한민국의 진보가 자꾸 망하는 이유는

차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선명성만 밀고나가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투쟁은 하되 분열하지 않는 길은 없을까요?

[레벨:9]흔들린는풀잎

2015.05.27 16:03:46

네...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삶에 대한 인간의 거친 태도...

피할 수도 없고... 인간의 삶의 구석구석을 파괴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조금 더 넓혀서... 피조된 생명 세계의 원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거친 특성과 부드러운 특성은 어느 한 쪽만이 주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양지와 음지를 만들어놓은 창조주의 오묘한... 탁월한 ?... 알 수 없는... 양면의 조화만이 답이 아닐런지요...

그것이 타협이든지... 한쪽의 일방적 변혁이든지... 아니면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치든지... 다양하게 변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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