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귀신들린 사람 (7)

조회 수 2214 추천 수 26 2007.04.11 08:15:17
2007년 4월11일 귀신들린 사람 (7)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 5:5)

괴성을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해치는 이 사람에게서 우리는 현대인의 자학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만 특별히 자녀 교육에서 이런 현상은 극에 달합니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무리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어떻게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구조화된 문제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학교와 학원과 개인과외 학습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는 자녀들은 분명히 자기 몸을 돌로 해치는 귀신들린 사람과 똑같습니다.
지난날보다 물량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는데도 여전히 자학적인 행태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의 본질이 어디부터인가 왜곡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과도한 경쟁을 통해서만 삶을 확인하는데 찌들려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경쟁은 삶(생명)의 눈높이를 사람에게 둘 때 일어나는 삶의 확인 방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삶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이 열리게 될 겁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일상의 조건들까지 해결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리키는 삶의 태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말이 조금 옆으로 흘렀군요.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현대인의 삶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도 역시 자학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자주 말하지만, 죄책감이 그것입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심리학과 신앙(신학)을 혼동하기 때문에 신자들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죄책감은 자학을 통한 심리적 만족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이 나라(바실레이아)에 자학을 위한 자리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레벨:1]균형

2007.04.11 14:58:19

자신의 솔직한 발견을
죄책감에 의한 자학이라 일축하시려는 의도는 아니시지요?
죄책감에 머므르지 말라는 요청과
죄책감으로 시작되서 결국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사건은
단절이 아닌 연속으로 혹은 수순으로 귀결로 볼수 없을가요?

자 인식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힐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자학과 자인식은 대립되는 차원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다른 묘사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늘 말씀 하시는 '심화'의 뜻을 맛 볼수 있는
다비아 매일 Q.T를 통해 자극받고 있습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7.04.11 15:23:09

실제로 교회에서 "죄인식"을 "죄책감" 으로 잘못 가르쳐서 오히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면이 많지 않나요? 그리고 "죄인식" 수준도 굉장히 피상적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죄인식"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무장해제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과,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감정적인 비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용서 비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균형님은 그런 경험이 없으실지 몰라도, 저는 교회 속에서 그런 것 많이 느껴보았습니다...

[레벨:1]균형

2007.04.11 15:42:32

첫날처럼님,
이곳은 토론하는 공간이 아니지만... 저의 의견입니다.

죄의식과 죄책감을 굳이 분리된 혹은 다른 차원에서 볼필요가 있겠냐는 의견이였습니다.
저는 치열한 죄의식에 대한 하나의 결과로 죄책감은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늘 죄책감에 머무르는 경우라면 바람직 하지 않음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자인식을 통해 비로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은 필요한 과정이라 보는 것이지요.
곧 철저한 자인식 없는 하나님나라는 공허한 구호라는 입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책감을 주입함으로 대상을 도구화 하려는 의도에 휘말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죄인식의 결과로 혹은 과정으로 나타나는 죄책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냐는 입장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죄인식과 죄책감을 굳이 분리해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에 대한 저의 질문이지요.

[레벨:28]첫날처럼

2007.04.11 15:51:34

균형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죄책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어쩌면 영적인 무책임과 방종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레벨:1]균형

2007.04.11 16:05:36

네, 그렇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벨:0]두지랑

2007.04.11 16:36:59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원화된 의식구조를 어떻게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그렇습니다. 죄의 개념과 죄책감이라는 것도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고 제일 잘났다고 여기며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고자 욕망하는 게 인간 죄악의 실상이겠지요.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눈뜬 장님들이지요. 궁극적인 진리앞에 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 하는 게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지요.

하나님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기만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겠지요. 그것이 파괴적인 자책감과 다른 점은 긍정과 창조를 위한 희망의 씨앗이 된다는 점에서 질이 다른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그러므로 끊임없는 자기 돌이킴과 자기부정은 긍정적이고 확대된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되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간다는 뜻이 되겟찌요.

좀더 자세히 알기위해 구분되고 나누어진 인식의 틀이 하나로 통일되고 모아지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원화되고 나누어진 시각은 반듯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균형님의 균형잡힌 말씀이 은혜를 더하는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4.12 00:25:30

세례요한은 죄에 대해서 공격한 것 같은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네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 같은 거는
질병의 원인이 죄라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염두에 둔 것이구요,
예수님이 죄 개념을 말씀하시는 경우는
자기 행위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입니다.
죄도 일정한 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상황에 맞물려 있는 개념이지요.
어쨌든지 예수님은
그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에게
죄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말하기 시작하면 너무 긴데요.
로마서만 예로 든다면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죄에 대해서 길게 설명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칭의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정황을 무시하고
죄를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영적인 질병현상을 내가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레벨:1]균형

2007.04.12 12:42:49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강요해서 집단마취에 빠지게 하는 경우라고 보는 시각과
있는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함정이라 보는 의견간의 견해차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겠지요.

'죄'와 '의'사이의 간극
혹은 변증법적 긴장
이를 아우르는 '합'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속죄라면
정과 반은 대립이 아닌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진행과정이라
혹은 거치는 수순이라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칭의마저 가리는
죄의 일반화라면 '자학'이겠지요.
이 점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군요.

늘 친절하신
설명 감사합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7.04.13 12:33:16

기성 교회의 "죄의 도구화"도 심각한 현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1484 6월13일 방랑설교자 [1] 2007-06-13 2189
1483 9월30일 바라바 이야기(1) [2] 2009-09-29 2189
1482 4월3일 주는 그리스도시다(1) [7] 2008-04-02 2190
1481 4월23일 헌금(5) [2] 2009-04-22 2190
1480 바르트 신학 이야기(14) [2] 2011-02-11 2190
1479 대림절 단상(2) [2] 2013-12-18 2190
1478 과학과 하나님 [3] 2010-10-22 2191
1477 하나님 나라(11) [2] 2010-03-08 2192
1476 원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2] 2011-03-18 2193
1475 8월23일- 놀라움 (5) [1] 2006-08-23 2194
1474 7월27일 오병이어 (2) 2007-07-27 2194
1473 11월13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3) 2009-11-12 2194
1472 목사공부(215)- 목사 자녀 [4] 2014-12-16 2194
1471 1월17일 씨 (5) [1] 2007-01-17 2195
1470 9월12일 베드로의 울음(3) 2009-09-11 2195
1469 김·근·태, 1월3일 [4] 2012-01-03 2196
1468 2월17 일 들으라! [1] 2007-02-17 2197
1467 8월17일 “귀신아!”(5) [9] 2008-08-16 2197
1466 1월7일 그는 살아나셨다(21) 2010-01-06 2198
1465 예배(14) [6] 2011-09-21 219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