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27일 유월절 만찬 준비(2)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14:13)
유월절 양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를 때 죽음의 운명이 빗겨간다는 보장은 단지 약속이었지 확실한 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 양의 피가 실패로 끝나면 민족 전체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몰살당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의 축제입니다. 양의 피로 인해서 그들은 결국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전염병이 돌아서 모두 죽고 몇 가정만 살아남은 경우와 비슷합니다. 유월절 양은 생명에 대한 환희를 가리킵니다. 유월절 만찬은 죽음과 생명의 경계선에 들어선 사람들이 벌이는 영적인 축제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이 유월절 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로 인한 죽음은 죽음의 신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갔듯이(pass over) 기독교인들을 죄와 죽음에서 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와 속사도, 교부와 그 뒤를 이은 기독교 전체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 전체를 거론해야 할 겁니다. 핵심만 말합시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부활 경험 이전까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구원론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부활 이후로 예수님의 운명이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단순히 한 인간의 운명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놀라운 신비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유월절 절기에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을까? 거꾸로 생각해봅니다.
다가올 미래, 이 날을 설명하기 위하여
과거의 첫 유월의 사건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 우리의 부활을 위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이 진행되는 본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