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35)- 영화 찍기

조회 수 2223 추천 수 0 2016.10.12 07: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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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을 숙소에서 먹고 잠시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한창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집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해도 이렇게 춥고 늦은 밤에 나가는 거 싫어. 당신 혼자 갔다 와.’ 할 테니까요. 우리가 묵고 있는 곳이 바덴바덴 시에서 제법 떨어진 곳으로 처음에는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더군요.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습니다. 언덕 정상인 셈이지요. 그 위로는 집이 없고, 야산이 이어집니다. 그 너머로 더 가면 공동묘지가 나옵니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조금 보였습니다. 구름 사이의 틈이 너무 좁아서 달은 얼굴을 내밀지 못합니다. 어디선가 개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개가 아니고 다른 동물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 멀리 언덕 아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약간 들립니다. 어디건 완벽한 정적을 찾기는 힘들군요. 베를린, 하이데나우, 인스부르크에서도 소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집사람이 오늘 피곤하다면서 오전에 쉬고 오후에 나가자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집사람도 얼마 있지 않으면 환갑이 다가오니까 이런 긴 여행이 체력적으로 큰 부담이 되니, 무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저는 아직 그런 부담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오전에 저는 칼 브라텐의 <신의 미래>를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읽었고, 여기서도 시간이 날 때 조금씩 읽은 책입니다. 이제 몇 쪽만 읽으면 끝납니다. 소득이 컸습니다. 브라텐의 신학에는 역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와 비슷한 연배 신학자들은 대개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그가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그럴만합니다. 그는 폴 틸리히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보통 틸리히를 실존주의 신학 계열로 분류합니다. 더 구체적인 용어로는 문화의 신학자라고 부릅니다. 브라텐의 책을 읽다보니 틸리히가 역사 혁명을 핵심 신학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더군요. 예상 외였습니다. 브라텐이 틸리히를 정확하게 본 건지, 아니면 자기의 구미에 맞도록 해석한 것인지는 좀더 논의가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내용 중에서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 정신은 ... 혁명 고유의 조직체를 가질 수 없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실패를 보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시인들뿐이라고도 했다. 시인들은 기억의 창고를 지켜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우리들이 가지고 살 수 있는 말들을만들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인들에게 모든 신망(credit)을 걸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들에 대한 신망은 어떤가? 또한 메시야의 백성들에게 대한 신망은 어떤가? 종말론적 소명을 의식하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또는 그 모든 영광 가운데서 도래할 메시야 왕굴이 임할 때까지 뜨거운 비판의 불을 뿜으면서 희망의 정치학(a politics of hope)을 추구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재 이룬 모든 성취물 밖에 서서 모든 희망이 현실성(reality)이 되도록 불을 붙이며, 또한 기억의 창고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채워져 있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용사들이 늙었을 때, 혁명 정신을 가진 젊은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유일무이한 최후의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대망하는 것뿐이다(248).

 

오늘 점심은 바덴바덴 중앙역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태국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테이크아웃 해가는 손님들도 있었고, 배달도 하더군요. 가을 햇살을 느끼면서 그곳에서 40분쯤 앉아 있다가, 구 시가지로 가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습니다. 앞에서 들렸던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는 인구가 12만 명 가까이 되고, 이곳 바덴바덴은 55천명쯤 됩니다. 작은 도시들이지만 다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입니다. 역사가 깊은 도시의 풍경들은 대개 비슷합니다. 고풍스러운 교회당과 상가건물들이 있고, 숲이 많고, (그 나라의 경제력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거리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관광객들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바덴바덴은 이름에서 풍기듯이 온천으로 유명합니다. 온천욕을 했냐구요? 밑에서 사진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리 귀띔을 한다면 보기에 따라서 했다고도 할 수 있고,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충 볼 거 다 보고,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도 다 먹고, 저녁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와서 조금 늦게 저녁밥을 함께 해먹은 걸로 오늘 공식 일정이 끝났습니다. 하루가 책 한 페이지를 넘기듯이 지나가는군요.


오늘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뭔지 알려달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 같네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데 공연히 설레발을 치는지 모르지만요. 순간순간이 다 인상 깊이 남았으니 그중에서 한 가지를 고를 수는 없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바덴바덴에 나와 있는 저희 부부만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지구에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다 삶의 정점입니다. 고통과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게 타당하지 않다는 말을 하지는 마세요. 어쨌든지 늦은 오후 카페에 들어가 앉아서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여러 행인들을 본 것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그걸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그 시간에 그 카페에 앉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일단 놀라운 일이었고, 그 카페 안에서 일어났던 소소인 장면들, 특히 일정 시간 창문 밖을 향해서 카메라 렌즈를 고정시켜서 얻은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담고 있겠습니까. 우연, 우연, 우연... 그리고 또 우연이 겹쳐서 필연이 되었어요. 제가 영화감독이라면 그 한 순간을 여러 시각으로 포착해볼 겁니다. 행인 1,2,3 ... 등등의 운명이 다 그 한 순간으로 모여들 수 있겠지요. 마술 같은 거지요. 아마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분이 이미 있을 겁니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각으로 접근한 소설도 있긴 합니다. 제가 보기에 삶은 역사와 신비의 결합입니다. 역사가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신비는 소프트웨어지요. 그 모든 것의 총체가 하나님의 섭리이구요. , 설교는 그만 하고,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만났던 것들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영화 찍기라는 소제목으로 글을 올리는 탓인지 사진 장수가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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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괜찮아 보이겠지만, 맛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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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창문으로 내다본 밖 광경입니다. 햇살이 저렇게 가을비처럼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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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 길을 놓쳐서 우회한 덕분에 들리게 된 가톨릭 교회당 모습이 새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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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감각이 녹아나는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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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로비입니다. 저게 강한 조명을 받게 설치된 저 조형물이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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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치하에서 고통받은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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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시가지 모습을 연달아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져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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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등장 인물들이 많습니다. 영화를 찌는 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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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가장 화려한 가게 중의 하나가 약국입니다. 어딜 가나 약국은  눈에 두드러지게 장식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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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건물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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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골목입니다. 옛날에는 저 골목으로 마차도 수없이 다녔겠지요. 제가 서 있는 쪽이 언던 뒤인데, 이쪽이 옛날 장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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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길 한 가게 달려 있는 문장을 찍었어요. 골목이 끝나면 온천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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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평화 온천'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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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장 광장에 노천으로 온천물을 보내고 있어요. 거기에 손을 담갔으니 온천을 했다고 해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저도 손을 넣어봤는데, 체온 온도보다는 더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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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들어갈까? 그사람들과 섞여서 온천하는 거 별론데. 물품도 가져오지 않았고. 혼탕일지도 모르잖아. 못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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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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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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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성탄 장식이 멋질 거 같습니다. 이제 영화 찍기가 시작됩니다. 카페에서 창문을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분들을 렌즈에 담았습니다. 많은 사연을 안고 창문 앞을 그분들이 지나고 있습니다. 형편 상 몇 장면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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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났습니다. 초상권 침해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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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동묘지에 들렸습니다. 여섯살밖에 살지 못한 밖에 살지 못한 안넬리제 피터가  묻혀 있군요. 전쟁 통에 죽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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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다 두살이나 적은 데 작년에 돌아가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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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돌아가신 분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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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 갈 때마다 사진찍기에 정신을 파는 분이 계십니다. 죽은 이를 생각한다기보다는 꽃과 나무에 마음을 빼앗기는 거지요. 오늘 하루도 모두 안식을, 그리고 언젠가 영원한 안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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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2016.10.12 10:54:43

오늘도 함께 여행을 다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신의 미래'를 읽고 싶은데 절판되어 살  수가 없네요ㅠㅠ

'희망의 정치학' '기억의 창고'가 재미있는 말입니다.

영화찍기의 제목이 멋집니다.

카메라를 갖다 대면 그 사람의 일생이 비데오로 상영되는 그런 날이 올까요?

교회당이나 성당이나 다 예술작품들이네요.

독일의 가장 위대한 점은 가해자로서의 진정한 참회라고 봅니다.

약국이 화려하다는 것도 처음 봅니다. 다른 것도 팔지 않나요?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각양각색이네요.

손가락 온천도 처음 보구요 ㅎㅎ

보는 눈, 듣는 귀도 제 각각이지요

보는 것을 보는 눈이 행복하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서 보고 듣는 편이지요.

사진 찍는 사모님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고고씽~ ~ ~




profile

[레벨:29]캔디

2016.10.12 16:03:24

이렇게 여행기 올리시는 것도 보통 노동이 아닐텐데...

그러니 사모님께서 목사님께 노트북만 끌어안고 계신다고 할만도 합니다ㅎㅎ


계속바뀌는 창밖에 영상이 영화를 보는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수도 있겠어요.

오늘도 즐거운 여행을 할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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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10.12 17:08:42

주안- 오늘 아침에 또 시간이 나서 <신의 미래>를 끝냈습니다. 마지막 구절을 읽어 드리지요.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군단(a peace corps)을 이루며,

또 그 이상 더 폭력이 있을 수 없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없고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계 21:4) 그런 미래를 향한

'그 길(the way)을 가리키는 하나의 구세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혁명적 존재로서 살고 있는 최후의 목표인 것이다.(257쪽).


캔디- 일기는 고통스런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노동인 것처럼 지금 저는 여행일지를 쓰고 있어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늘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가려고 하는데, 집사람 준비가 늦어서 아무래도 점시 시간 전에는 힘들겠군요. <초기 기독교의 형성>을 쓴 신학자가(이름이 라크엔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고...) 여기 스트라스부르 신학대학교 교수입니다. 은퇴했는지는 잘 모르겠구요. 바덴바덴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쉽게 다녀올 듯합니다.

[레벨:21]주안

2016.10.12 17:48:54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의 사도로서

혁명적 존재로 살아야한다는 사명!

중요하고도 멋진 명령입니다.

ㅠㅠ중고서점에서도 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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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2016.10.12 21:41:44

오늘 영화찍기, 참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군요..

우리의 삶도 한 순간 한 순간이 역사와 신비가 결합 된 영화다..

매우 공감이 됩니다. 목사님과 이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여행을 즐기시는 사모님이 무척 부러워집니다.

오늘 저희부부도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초록이 지쳐가는 숲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는데요,

대사가 절인배추가 어쩌고.., 공장 폐기물 처리는 어쩌고..

목사님의 영화랑 사뭇 쟝르가 다르지요?ㅎㅎ

목사님의 여행이 얼마남지 않았군요.

독일하면 무척 추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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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10.15 06:51:51

절인배추와 공장폐기물이 우리의 현실이니

웃겨 님의 영화야말로 한 수 위지요.

쾰른으로 올라오니 기온이 좀 올라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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