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12일 짧은 어록(1): 믿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11:23)
무화과나무 사건 이후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세 어록을 열거합니다. 믿음(23절), 기도(24절), 용서(25절)가 그것입니다. 이 어록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 가깝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어록은 마가복음 이전에 형태를 갖춘 것들인데, 공관복음서에서 각각 독립적인 전승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먼저 위 구절이 말하는 ‘믿음’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오.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마 17:20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인 ‘겨자씨 한 알만한’이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뽕나무를 예로 들지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산을 예로 듭니다. 무화과나무 전승 보도인 마 21:21절에서도 산이 바다에 던져진다는 어구가 반복되는 걸 보면 이 형태의 구절이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게 분명해보입니다.
이런 표현은 과장법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산을 바다에 던져 넣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과장법을 통해서 지금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입니다. 구원자는 못 할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거나 산을 바다에 빠지게 하는 일도 그에게는 가능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도 믿음이 있으면 그런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뿐입니다. 즉 메시아를 믿음으로써 메시아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감상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의지에 의한 영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거기에 감상과 심리가 따라올 수는 있으나
그것이 주도하는 건 결코 아니지요.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해설>에서
믿음(Glauben)과 신뢰(Vertrauen)을 구분합니다.
이 둘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서로 결속되어 있다는 거지요.
믿음은 무조건적인 의존성이라고 한다면
신뢰는 어떤 근거가 있는 의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근거는 분명히 이성의 차원으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신뢰할만하니까 믿는 것이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믿는 거는 아니라는 거지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믿는 거는 광신에 가깝겠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삼위일체론적 구도에서 인식하고 믿는 사람들이랍니다.
좋은 하루.
믿음은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표현한 것을 듣고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단순히 '잘 믿겨지는 심리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고 안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너는 정말로 믿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왠지 켕기는 구석이 있는데
'너는 정말로 찾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왠지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