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 신학 이야기(6)

조회 수 2302 추천 수 1 2011.01.22 23:15:58

여기서 의미하는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는 저 말씀에 대한 대답으로서 무엇보다도 말씀의 창조행위에 의해서 촉발되며, 실존하고, 현실적이 된다. 이 말씀의 선행이 없이는 본래의 신학, 곧 복음주의 신학이 있을 없다. 물론 신학이 저 말씀을 실제로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저 말씀의 증인들의 말들을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킨다. 말씀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석조차 하는 것이 아니다. 저 말씀은 모든 해석에 선행하여 말씀되었고, 수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선포되었다. 신학이란 위의 사실을 전제하며 위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38)

 

     위의 글은 어떻소? 도대체 바르트가 반복해서 말하는 ‘말씀’이 무엇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시오? 독일어로 말씀은 Wort요. 단어, 낱말이라는 뜻이요.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Wort Gottes)이라는 것이 가능하오? 사람은 말을 하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말이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소.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말하오. 바르트는 위 글에서 신학자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구분하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해석할 수 없다고 하오. 기껏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소. 이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하오. 우리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이들의 말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관해서 조금 말할 수 있을 뿐이오. 바르트가 말하는 ‘말씀’론은 마치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존재론과 비슷하오. 인간의 말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원천을 가리키오. 그런 말씀의 깊이가 느껴지시오? (2011년 1월22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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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도도아빠

2011.01.23 10:27:23

목사님이 종종 말씀하시는 '불립문자'의 감을 잡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신학자의 말) 사이의 그 골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요?

 

신학만이 아니라, 엄격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도, 사람 사이에 과연 정확한 의사 소통이 가능한가, 이 문제 역시 논쟁거립니다. 여기에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불통이 놓여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결국 영성, 신비, 결단의 문제인지요?     -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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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1.01.24 11:10:43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문제란 거지요?

근본적으로는 안 되지만

계시론적으로는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요.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는 접어둔 이야기에요.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역사적으로 검증됩니다.

이건 사실 신앙이나 신학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학문에 연관된 이야기에요.

호킹의 말이 옳은지 아닌지는 역사가 검증하게 되겠지요.

근원적인 것은 우리에게 숨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아냐구요?

음, 핵심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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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2011.01.24 01:02:01

목사님! 전부터 궁금했던건데 여기서 여쭈어봅니다.

목사님께서는 여러곳에서 하나님께서 성대가 없으시고 또 히브리어로 말씀하셨겠느냐...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3장에는

1    아이 사무엘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    엘리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처럼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시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기도 어렵고, 또 저자가 임의대로 기록하였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습니다.

내용상으로 사무엘은 여호와의 음성을 실제 사람의 음성처럼 들은듯 합니다. 그래서 엘리가 부르는줄로 착각하여 엘리에게로 달려간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미를 전달하시고 이 의미가 인간에게는 음성처럼 들릴것이라고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천사도 사람에게 말을 하지요.. 천사가 성대가 있습니까?  제가 말하는 부분은 바로 음성이 들린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부분을 말하는것입니다.

물론 구약사람들이 자신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받은 신탁을 직접 들은것처럼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사무엘처럼 직접 들은것을 기록한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히브리방언으로 들었다는것도 목사님께서는  바울이 음성을 들은 세번이 이야기가 다 조금씩 다르기때문에 신빙성의 문제가 있다는식으로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여쭌김에 한가지 더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예수께서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람어를 사용하셨다고 하시면서 히브리어가 당시에는 사어가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근거가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을 가능성이 높지만 히브리어가 사어가 된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도 사도행전21장에서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  서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에 디아스포라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아서 일부만 히브리어를 사용했지만 사어가 된것은 아닌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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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1.01.24 11:24:50

하나님의 음성이라...

사무엘,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등등,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사건이에요.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바울의 증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의 사실적인 표현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전승은 그 과정에서 첨삭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 중심이 어떤 경험이었느냐를 아는 게 중요하지

천둥소리를 들었다 아니다가 중요하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성서시대의 언어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릅니다.

예수님이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거지요.

팔레스틴은 그야말로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마치 몸 파는 여자처럼 수탈당한 지역입니다.

아람 제국, 또는 아람 문화가 어느 정도로

그 지역을지배했는지를 설명하려면 내가 따로 공부해야겠네요.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완전히 다른 언어도 아니에요.

서로 뒤엉켜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어가 사어가 되었다는 말은

굳이 말하자면 당시에 공영어가 아니었다는 뜻이지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대목은 좀더 자세한 주석이 필요할 것 같군요.

실제 히브리어를 말하는지,

아니면 헬라어와 대립적인 차원에서 아람어를 말하는지

(아람어가 히브리어와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군요.

예수 당시의 언어에 대한 연구논문이 있을겁니다.

평생 공부벌레 웃음 님이 한번 찾아서 공부하시고,

다비아에 올려주세요.

나도 자세하게 알고 싶군요.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모든 언어가 사라집니다. ㅎㅎ 

  

[레벨:7]빈이

2011.01.24 14:43:38

참고로, 그리스어 성서에는 εβραιδι διαλεκτω (Hebraïs dialektos) 라고 되어있습니다.

찾아보니 대부분 히브리 어, 혹은 Hebrew dialect / in Hebrew tongue 으로 번역하고 있구요,

NIV에서는 이걸 Aramaic 으로 번역하고, 각주를 두어 ("Or possibly Hebrew; also in 22:2") 라고 쓰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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