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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말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엑서더스,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이집트와 바벨론은 제국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국의 속성인 제국주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리의 준거를 자신에게만 한정함으로써 패권을 행사하는 힘이 곧 제국주의인데, 이집트와 바벨론은 전형적인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는 바로 신(神)이었습니다. 약간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제국과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강력한 힘으로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는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을까요?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나 할까요? 거꾸로 기독교 스스로 제국주의적 패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자기를 확장해야하겠다는 욕망이 내용적인 면에서 제국주의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보면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는 자기가 극복해야 할 그 악한 힘을 자기 내부에 키우고 있는 셈이겠지요.
둘째, 출애굽과 포로귀환은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출애굽을 보도하고 있는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는 제국을 하나님이 무력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야훼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게 곧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 구원 사건이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이 주로 정치, 사회적인 사건과 연결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칫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곧 정치적 해방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서읽기의 방향 착오입니다. 복음이 정치적으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정치적 해방이 곧 복음은 아닙니다.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보도하는 구약성서의 중심도 역시 그 정치적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있습니다. 엄중한 국제질서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신약성서는 복음을 전혀 새로운 지평에서 접근합니다. 신약의 정치적 배경도 역시 로마라는 제국이지만 신약의 복음은 더 이상 정치적 해방보다는 어떤 한 인격체와의 일치를 통한 궁극적인 해방을 선포합니다. 아마 신약성서는 구약이 그렇게 천착했던 정치적 해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정치적 해방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정치의 최종 목표인 복지의 극대화를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한 사건, 한 운명에서 복음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 복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나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말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엑서더스,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이집트와 바벨론은 제국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국의 속성인 제국주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리의 준거를 자신에게만 한정함으로써 패권을 행사하는 힘이 곧 제국주의인데, 이집트와 바벨론은 전형적인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는 바로 신(神)이었습니다. 약간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제국과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강력한 힘으로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는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을까요?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나 할까요? 거꾸로 기독교 스스로 제국주의적 패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자기를 확장해야하겠다는 욕망이 내용적인 면에서 제국주의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보면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는 자기가 극복해야 할 그 악한 힘을 자기 내부에 키우고 있는 셈이겠지요.
둘째, 출애굽과 포로귀환은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출애굽을 보도하고 있는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는 제국을 하나님이 무력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야훼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게 곧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 구원 사건이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이 주로 정치, 사회적인 사건과 연결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칫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곧 정치적 해방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서읽기의 방향 착오입니다. 복음이 정치적으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정치적 해방이 곧 복음은 아닙니다.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보도하는 구약성서의 중심도 역시 그 정치적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있습니다. 엄중한 국제질서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신약성서는 복음을 전혀 새로운 지평에서 접근합니다. 신약의 정치적 배경도 역시 로마라는 제국이지만 신약의 복음은 더 이상 정치적 해방보다는 어떤 한 인격체와의 일치를 통한 궁극적인 해방을 선포합니다. 아마 신약성서는 구약이 그렇게 천착했던 정치적 해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정치적 해방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정치의 최종 목표인 복지의 극대화를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한 사건, 한 운명에서 복음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 복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