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物) 003- 연필

조회 수 1141 추천 수 0 2022.03.03 07:59:19

() 003- 연필

003.JPG

긴 글을 쓸 때는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짧은 글을 쓸 때는 필기도구를 사용한다. 예컨대 설교를 준비하느라 요약문을 작성할 때는 연필이나 볼펜으로, 실제 설교문을 작성할 때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요즘은 필기도구가 흔하디흔해서 아이들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나 옛날에는 정말 귀했다.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는 걸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예수의 아포리즘은 이런 일상의 씀씀이에도 해당한다.

필기도구도 여러 종류다. 나는 주로 볼펜과 연필을 사용한다. 색연필도 가끔 사용한다. 샤프펜슬도 얼마 전까지 사용하다가 심을 장만해놓지 않아서 지금은 사용하지 못한다. 만년필도 수년 전까지 사용했다. 글쓰기의 느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도구를 차례대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연필이 으뜸이고, 다음이 만년필이고, 다음이 색연필, 마지막이 볼펜이다. 연필은 어렸을 때 몸에 밴 도구다. 연필심에 침을 발라야 잘 써졌다. 연필 따먹기도 자주 했다. 책상 위에서 연필을 손가락으로 튕겨 상대 연필을 밑으로 떨어뜨리는 놀이다. 볼펜 글쓰기에서는 볼이 구르면서 흔적을 남기니까 뭔가 기계를 다루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다. 잉크 똥도 별로 상쾌하지 않다. 그래도 편리하니까 자주 쓴다. 붓글씨는 옛날 초등학교 시절 특별 활동 시간에 써본 후로는 거의 접할 기회가 없어서 거리가 멀다.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일단 내 뇌에서 어떤 생각이 어깨와 팔과 손을 거쳐 연필에 전달되어야 한다. 내 손과 손가락은 그 흐름을 자연스레 따라야 한다. 연필심이 종이에 닿아 획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나의 마음과 몸과 세계는 하나가 된다. 컴퓨터 자판은 그런 느낌을 자아내지 못한다. 어쨌든지 연필이 만들어내는 그림이나 문자는 나의 삶 자체나 마찬가지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해도 잘못이 아니다.

위 사진은 책상 위 필통에 들어있는 것 중에서 골라낸 필기도구다. 나의 오랜 친구와 같다. 저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날 것이다.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나의 글쓰기 행위에서 자기 몸을 가루 만들고 사라질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떠나지 않겠는가. 그 운명을 거스르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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