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9일, 토
위로하라(5)
내일 대림절 둘째 주일 예배의 헌금찬송과 마침찬송은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 1절과 2절을 각각 부른다. 나이가 든 이들은 이 찬송가를 처지는 속도로 부를 텐데, 찬송가 악상으로는 조금 빠르게(1분에 사분음표 100번의 속도) 부르는 게 좋다. 대림절 찬송이니 기쁜 마음으로 가볍게, 뭔가를 치고나가는 느낌으로 불러야 한다. 가사를 읽어보자.
1절: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 강림하셔서 죄에 매인 백성들을 자유 얻게 하시네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되시니 오래 기다리던 백성 많은 복을 받겠네.
가사가 간단하지만 의미는 깊다. 어려운 대목도 없어 보인다. ‘죄에 매인 백성’이라는 말은 단순히 부도덕하다거나 반사회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죄는 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킨다. 자기 집중이 죄다. 여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니 살아있는 한 불가능하다. 바울도 살아있는 한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잣대로 평가하다. 특히 지식인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인정받은 것을 자신이 높아진 것으로 여긴다. 착각이다. 사람은 한 부분에서 아무리 전문적인 식견이 있어도 다른 부분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전문가나 비전문가는 모두 평균적으로 볼 때 비슷하다. 대학교 총장과 전업주부가 평균으로 볼 때 비슷하다. 그런데도 자기를 중심에 놓고 판단하고 재단하는 방식에 고착되는 것이 바로 죄다. 이런 우리의 실존에서 예수가 왜 소망, 힘, 위로, 복일까?
2절: 모든 백성 구하려고 임금으로 오시니 영원토록 우리들을 친히 다스리시네 죄로 상한 우리 마음 은혜로써 고치고 주의 빛난 보좌 앞에 이르도록 하소서.
‘빛난 보좌’라는 표현이 요한계시록에도 자주 나온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 나온다. 보좌는 임금이 앉는 곳이다. 성서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리가 보좌다. 예수가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임금이라는 말은 실제로 임금처럼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게 아니라 그가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기에 예수는 우리 생명 세계에서 보좌에 앉을 임금이다. 빛난 보좌 앞에 이른다는 것은 그 생명 세계에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이걸 어떻게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까? 대림절 기간에 묵상의 제목으로 삼았으면 한다.
복의 개념이 예수의 오심으로 자기집중의 삶에서 벗어나는 거네요?
삶의 전반을 자기중심으로 생각, 판단하는 것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 판단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 줌심으로 사는게 무엇인지? 갑자기 막히는군요.ㅠㅠ
다만 내중심이 아니고 이웃을.. 이웃의 생명(다른사람, 다른 피조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때에 따라 조금은 생각할수 있지만 전체를 내중심 아닌것으로 살아간다는건 어렵지.. 싶어요. 그래서 주님오심을 기다리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