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21)

조회 수 1117 추천 수 0 2015.03.13 09:23:25

 

21) 313()

 

<본문읽기>

 

107:1-3, 17-22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12:5-13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1:7-14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집중 묵상구절>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묵상>

위 본문은 사실 어마어마한 이야기다. 구원의 우주론적 차원에 대한 이야기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된다는 말은 우주가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 완성이 구원이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은 개인적인 차원이다. 예수 잘 믿고, 바르게 살다가 죽어 천당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은 아니다. 에베소서 기자도 위 본문을 언급하기 전에 그 사실을 먼저 언급했다. 구원의 개인적인 차원과 우주론적 차원이 깊이 연루되어 있는 셈이다. 개인적인 차원을 간략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자.

 

1:7절은 이렇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김 받았다는 사실이 구원의 개인적인 차원이다. 이 사실을 협의로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 도둑질, 강도질, 거짓말 등, 세상이 파렴치한 행위로 규정하는 일들이 용서받았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곁가지다. 그런 파렴치한 일들은 조금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당한 정도로 해결이 된다. 또한 이런 일들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어떤 사람이 조금 낫다고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결과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결과인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면 우리가 예수의 피로 생명을, 좀더 분명하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도 생명의 근원이라 할 하나님 나라를 실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비유로 말했을 뿐이다. 생명이 완성될 시기에 대해서도 예수는 확증해서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에 속한 문제라서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만 생명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있다. 세상에 던짐을 당한, 또는 세상의 생명 형식에 들어와 있는, 성서적인 표현으로는 피조물의 운명을 지닌 인간은 아무도 생명을 알지 못한다. 참된 생명을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우리에게 최선은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할 그 순간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의 기다림은 감나무 아래서 입을 벌리는 방식이 아니다. 참된 기다림이 막연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영원한 생명이 아닌 것, 하나님이 아닌 것, 거룩한 게 아닌 것을 살펴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공부가 필요하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해석인 인문학 공부도 필요하다. 신학공부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이런 것들을 살피면서 생명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는 게 바로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7절 말씀에 대한 것이었다. 생명을 우리의 인식과 경험에 한정하면 곤란하다는 사실도 짚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한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10절 말씀이 저절로 이해가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일치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에 속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말, 즉 생명 얻는다는 말을 잘 먹고 잘 사는 것쯤으로 오해한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쉽게 보자. 흙은 생명인가, 아닌가? 돌은 어떤가? 강물은 어떤가? 그런 것들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나무도 없고, 새도 없다. 탄소가 들어 있는 것을 유기물이라고 한다. 그 유기물이 생명의 기초다. 물리학이 그렇게 설명한다. 무기물은 생명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을까? 보통은 자기 복제가 가능한 것을 생명체라고 한다. 자기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 명백한가? 실체로 나타난 색()은 무엇이고, 실체가 없는 공()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면 끝이 없고 아득할 것이다. 이런 경험이 성서의 바탕에 놓여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구원, 즉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어 하나님에 실행하실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한 하나님의 구원 신비에 속하는 것이기에.

 

<기도>

주님, 지금 우리 눈에 아득해 보이는 우주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그 순간을 우리는 지금 기다립니다. 예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안개, 가을비 file [5]

  • 2016-11-18
  • 조회 수 1135

11월18일, 금 안개, 가을비 오늘 아침 평소처럼 7시에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우리집 식당은 거실 겸해서 가족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실이 우리집에는 없다. 한 마디로 우리집 구조는 해괴하다.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카페도 아닌 것이, 일반 주택도 아니고, 연구소도 아닌 것이, 수도원도 아니다.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순서 없이 짓다보다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나름으로 운치도 있다. 몇 군데 리모델링을 마음먹고 있는데, 집사람과 의견이 달라서 시작을 못하...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3]

  • 2016-10-24
  • 조회 수 1135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10월23일, 창조절 여덟째 주일, 10월23일 1) 저는 아내와 함께 9월19일에 출발해서 10월20일에 돌아오는 한 달간의 안식월 독일 여행을 마쳤습니다. 교우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으로 아무런 사고 없이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독일 교회 예배에 회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다가 오늘(10월23일) 설교자로 서니 부담감도 컸고, 기쁨도 컸습니다. 우리말로 예배를 드린다는 게 이렇게 편안한 건지 새삼 더 절감했습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독일 교회에서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는 둥 마는 둥 합니...

씨의 현재

  • 2015-06-16
  • 조회 수 1135

6월16일 씨의 현재 식물은 대개 씨가 있다. 씨가 없는 식물도 있는지, 나는 모른다. 꽃이 있으면 씨가 맺힌다. 아카시아도 꽃이 피고 씨가 맺힌다. 씨는 식물과 나무가 생명을 연장하는 통로다. 씨를 통해서 자신을 복제하는 거다. 사람도 역시 씨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시킨다. 인간의 난자와 정자도 결국 씨가 아닌가. 씨도 모양과 크기가 가지각색이다. 내가 지난봄에 구입한 해바라기 씨는 제법 컸다. 러시안 해바라기는 1.5센티 정도 되어 보였다. 작년 가을에 몇 종류의 씨를 받아두었다. 봉숭아, 분꽃, 코스모스다. 씨는 생...

교양, 또는 여흥 [4]

  • 2016-04-06
  • 조회 수 1134

4월6일 교양, 또는 여흥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비장하게 들린다. 설교에서 설명한 것처럼 헬라어 ‘마르투스’는 증인이면서 동시에 순교자라는 뜻이다. 극한의 경쟁에 내몰리거나 삶을 편안하게 즐기려는 현대인들에게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가슴에 와 닿기 힘들다. 많은 경우에 신앙생활도 교양의 수준으로, 더 심하게는 여흥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입담 좋은 멘토의 힐링 캠프에 참석하는 기분으로, 또는 티브이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나 프로 야구장에 가는 기분으로 받아들인다. 교양과 여흥은 단순히 재미를 우리에게 제...

누가복음 톺아읽기 276

  • 2021-11-23
  • 조회 수 1133

대구 성서아카데미(dabia.net)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 『누가복음 톺아 읽기』 276, 눅 15:11~32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1) https://youtu.be/mvTIQvK5RBE

누가복음 톺아 읽기 154

  • 2021-06-04
  • 조회 수 1133

대구 성서아카데미(dabia.net)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 『누가복음 톺아 읽기』 154, 눅 6:20 https://youtu.be/T1hyadVpvIU

초청 거절 [1]

  • 2016-09-02
  • 조회 수 1133

9월2일 초청 거절 눅 14장에는 잔치와 식사 초대에 대한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세 가지 나온다. 앞의 두 가지가 설교 본문이었다. 세 번 째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미리 초청장을 보냈던 이들을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종들을 보냈다. 그들은 다 참석할 수 없는 핑계를 대고 점잖게 거절했다. 나는 밭을 샀으니 거기 가봐야겠다. 나는 열 마리 소를 샀다. 나는 장가를 들었다. 다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

예수 어록(034) 요 3:10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 2019-01-18
  • 조회 수 1132

예수 어록(034) 요 3:10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성령으로 거듭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다시 질문한다. 니고데모가 실제로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개념에 대한 설명을 더 정확하게 듣고 싶어서 일부러 질문한 것인지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대충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지만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지식인답게 대화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뒤편으로 가면 니고데모가 몇 번 ...

공적 시선 [4]

  • 2016-10-28
  • 조회 수 1132

10월28일 공적 시선 한국 물리학회 정기 학회가 열리는 자리에 목사가 초청받아서 창조를 주제로 강의, 또는 설교를 한다고 상상해보자. 거기 모인 사람들은 빅뱅과 우주 팽창설과 초끈이론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는 그들처럼 우주와 물리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지만, 그리고 그들이 그런 걸 목사에게 원하지 않겠지만, 성서가 말하는 세계와 우주와 그 기원과 완성에 대해서 오늘날 밝혀진 과학 이론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러나 고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요한계...

모두 죽는다(5)

  • 2015-10-12
  • 조회 수 1132

10월12일 모두 죽는다(5) 사람은 ‘모두’ 죽는다. 예외가 없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나 못사는 나라 사람이 다르지 않다.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없다. 부자라고 해서 죽음이 피해가지 않고, 거꾸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죽음이 피해가지 않는다. 교황도 죽고, 노숙자도 죽는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만 있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삶이 피곤한 사람들도 이 사실로 인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거꾸로 삶이 즐거운 사람들도 이 사실로 인해서 교만하지 ...

9월9일 오병이어 (46) [1]

  • 2007-09-08
  • 조회 수 1132

2007년 9월9일 오병이어 (46)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어제 묵상에서 묻어두었던 두 질문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첫째,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결국 똑같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기적 행위자로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복음서의 중심은 아닙니다.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사건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단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

예수 어록(005)- “와서 보라!”(2)

  • 2018-12-08
  • 조회 수 1132

예수&로고스 005- 요 1:39(2) “와서 보라!”(2) ‘와서 보라.’는 문장은 동사 두 개의 결합이다. 하나는 ‘오라.’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일단 예수에게 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것도 옳다. 예수의 복음 전하려면 일단 그 복음 공동체로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 예수에게 온다는 말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참된 것에 대한 열망이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에 나오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그냥 교회 구성원이 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예수에...

목사 구원(122) [2]

  • 2018-06-20
  • 조회 수 1130

(122) 요한 시대는 로마 황제가 창조주나 마찬가지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기원후 51-96년)로 알려져 있다. 도미티아누스만이 아니라 여러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했다.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는 데서 기독교와 로마 제국과의 갈등을 이미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4세기에 국교로 지정되면서도 매 주일마다 예배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문장을 신앙고백으로 바쳤다. 당시 ...

성탄절(3)

  • 2017-12-28
  • 조회 수 1130

12월28일, 목 성탄절(3) 성탄절을 우리가 특별하게 기념하는 이유는 예수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한다. 이런 표현이 어떤 이들에게는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에 자녀를 둘 수 없다. 그런데도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밀착된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다.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될 정도로 특별한 존재인가? 근거가 무엇인가? ...

누가복음 톺아 읽기 317

  • 2022-01-19
  • 조회 수 1129

대구 성서아카데미(dabia.net)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 『누가복음 톺아 읽기』 317, 눅 21:20~28 인자의 날(2) https://youtu.be/tAF8aJ47x2s

목사 구원(81) [2]

  • 2018-04-24
  • 조회 수 1129

(81)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왜 자유를 얻는 첩경인지에 대한 앞에서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기독교 신앙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다. 이 질문도 역시 한 번의 대답을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한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얻은 자유가 실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이다. 인식 자체가 능력은 아니지 않은가. 신앙의 연륜을 많이 쌓은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질문 과정에 단단히 사로잡히지 않으면, 그가 목회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능력을 얻지 못...

목사 구원(16)

  • 2018-01-23
  • 조회 수 1129

(16) 삼위일체 개념은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일상에서 경험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양태론으로 떨어지기가 쉽다. 삼위일체 개념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독교의 중심 교리가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만 해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 개념을 가장 거칠게 한 마디로 하면 아버지, 아들, 영이 위격(페르조나)으로는 구분되나 본질(우시오스)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위격과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여기서도 필수다. 어쨌든지 삼위일체 관점에서 기독교가 성령을...

예수 어록(389) 요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2020-08-04
  • 조회 수 1128

예수 어록(389) 요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는 발언을 이어간다. “왜 내게 묻느냐?” “내 말을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안나스가 묻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수하에 있는 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확실한지 확인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발언에서 실수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추정할 뿐이지 확실한 이유는 우리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안나스의 질문이 요식 행위라는 것이다. 안나스로 대표되는 산헤드...

예수 어록(342) 요 15:17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 2020-05-29
  • 조회 수 1128

예수 어록(342)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을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사랑하는 말이 예수의 고별 연설을 다루는 이 대목에서 반복해서 나온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서 상투적으로 들린다. 요즘도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의 열매를 통해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식의 발언을 종종 듣는다. 이런 발언은 아무리 상투적인 발언이라고 해도 우리의 삶과 신앙을 살리는 능력이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면서 삶의 현실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우리가 운전면허...

물(物) 137- 잔디 위 버섯 file [2]

  • 2022-09-09
  • 조회 수 1127

비가 자주 온 탓인지 마당 잔디 위 여러 곳에 이름 모를 버섯이 자라기 시작했다. 저 버섯 포자를 이곳까지 실어나른 이는 분명 바람이리라. 지구에 바람이 있기에 생명 현상이 발생하니 바람을 생명의 ‘영’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