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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하나님을 흑암으로 경험했다면 설교의 관점이 달라진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너머를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 너머는 성경이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성경 이야기 너머를 본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이 아주 불확실해서 너머를 향해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으면 느낌도 없고 경험도 없다. 인격적이고 진정성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가 잠시 감동적으로 들리는 것 같은데도 결국은 영혼의 울림이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등학생들은 영웅전만으로도 열광하겠지만 대학생이 되면 삶의 더 깊은 차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영혼의 공명이 가능한 거 아닌가. 성경 이야기 너머로 나아가려면 인간과 역사와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이 깊어져야 한다. 이걸 한 마디로 줄이면 인문학적 사유다. 지식과 정보를 확대한다기보다 그런 지식과 정보의 이면을 뚫어볼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이면은 다른 말로 ‘세상의 비밀’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이다.
성경 이야기 너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것, 즉 은폐성이 하나님의 본질이다. 시인들은 세상의 은폐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들에 의해서 천둥소리와 국화꽃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드러난다. 하이데거가 시인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만이 아니라 성경기자들도 이 은폐성을 경험하고 그걸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은폐성의 밑바닥에 이를 수가 없어서 계시의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순간을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그 세계를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계시의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아브라함에게 흑암이 임했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근원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
자신이 성경 이야기 너머를 바라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세계가 없는것은 아닌데,
개인의 경험과 지식한계 안에서 인간과 세계를 주장하고 고집할때,
세상의 비밀과 하나님을 알기란 어려울것 같습니다.
저에게 성경이야기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성경기자들의 하나님 경험이라는 사실을 구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것은 흑암에서 한걸음 나아갈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